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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Fantasy

감상/ 전지적 독자 시점

by 뀽' 2020. 8. 28.

전지적 독자 시점  /  싱숑

★★★★★

이토록 낭만적인 메타소설

 

이것은,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한 이야기이다.

 

웹소 좀 읽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제목은 들어봤을 메가히트작 전독시. 어릴 적 읽었던 종이책 판소를 제외하면 웹소 입문 후엔 로맨스만 판 인간이라 판소는 낯가리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다들 전독시 전독시하며 울길래 호기심에 읽기 시작했다가 그 길로 멱살 잡혀 이마 박고 오열하게 되었습니다……. 괜히… 히트작인 게…… 아니다…… 다들 전독시… 읽으세요…….

 

제목과 함께 주인공의 이름―김독자(金獨子)―이 독특한 걸로도 유명한데, 시작은 일견 평범한 아포칼립스+빙의물로 느껴짐. 주인공만 읽던 조회수 1짜리 노잼 망소설 <멸살법>이 어느 날 갑자기 현실이 되면서, 유일한 완독자 주인공이 절대적인 정보 우위를 점하고 일행을 꾸려 생존해 나가는! 흔히 볼 수 있는 먼치킨 소설 같지만, 주인공의 이름이 ‘독자(讀者)’의 동음이의어란 점과 주인공의 대표 스킬명이 ‘제4의 벽’이란 것 등, 극초반부터 메타소설의 포석을 차곡차곡 놓고 있다. 그리고 사실 메타소설이고 뭐고 일단 그냥 전개가 엄청 재밌음ㅋㅋ 

 

초장부터 5분 내에 살생하지 않으면 머리가 터져 죽는 미친 상황에, 끊긴 다리를 건너라질 않나, 거대한 어류 몬스터에게 잡아먹히질 않나, 비축식량 없애질 않나 난이도 한국인 패치 이건 뭐 그냥 죽으라는 건지 헬난이도의 연속인데 우리 독자가 비록 사회성은 제로지만 <멸살법>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는 찐오타쿠란 말입니다!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상황에서 뛰어난 언변과 적극적인 행동으로 동료를 모으고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전개가 장르소설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도 남는다. 그냥 순수하게 먼치킨 소설로만 봐도 백점 만점에 이백점임.

 

하지만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작품 내에서 인간들의 고군분투 생존 이야기를 감상하며 아프리카 별풍선마냥 코인 쏘는 존재가 등장한다는 것, 그리고 성좌(星座)라고 불리는 그 존재들이 우리 모두 아는 역사 속 위인들이나 유명한 신화 속 인물들이라는 게 포인트. 즉, 전독시는 현대인들이 읽던 이야기 속 존재들이 오히려 현대인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그 삶을 소비하게 된, 이야기의 소비 주체와 객체가 전도된 구도를 통해 ‘한 사람의 생을 이야기로 소비하는 현실의 잔인성’ ‘그럼에도 인간은 그를 읽어주는 이가 있기에 비로소 존재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사실 이런 주제가 잘못하면 좀 뜬구름 잡는 소리 같고 현학적이라 느껴질 수도 있는데, 전독시는 자잘한 설정들이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어서 전혀 어렵거나 이질적이지 않음. 개연성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면 작게는 찌릿찌릿 정전기에서 크게는 벼락이 내리치는 거나, 쓰러진 사람에게 수액이 아닌 설화팩을 꽂아주는 설정, 말이 안 되는 행위를 해도 성좌들이 인정하면 개연성이 있다고 넘어갈 수 있는 점 등이 재밌다. 또 성좌들의 성격과 욕구가 제각각이라 누구는 사이다 전개를 요구하고 누구는 제 최애 인물의 활약을 원하는 등 온갖 난리를 치는 장면도 웹소설 독자로서 보면서 여러 번 움찔함ㅋㅋ

 

그리고 후반부로 달려가면서 점차 <멸살법>의 독자(讀者)인 김독자, <멸살법> 주인공인 유중혁, 그리고 <멸살법>을 표절한 작품의 작가 한수영, 세 인물이 부각되는데. 각각 작가, 주인공, 독자를 상징하는 이 세 사람의 구도나, 강력한 스킬인 줄만 알았던 제4의 벽의 진실, 그리고 초중반부에 풀렸던 김독자의 과거사가 재조명되면서 <멸살법>의 작가인 tls123의 정체와, 멸망한 세계 속 수많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소비하는 이 비극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드러난다. 그리고 저는… 저는…… (오열) 

 

복선이 징그러울 정도로 치밀하게 깔린 소설이라 눈치 있는 독자들은 대강 느낌이 올 텐데, 배후가 누군지 예상된다구요? 그러나 곧 알게 될 것이다, 단순히 예상한 것과 모든 일의 진상을 직접 맞닥뜨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을…. 저 소설 보면서 미친 사람처럼 꺽꺽 소리내며 운 경험이 그리 많지는 않은데요… 끝까지 읽은 사람은 김독자 하나였던, 평균 조회수가 1에 수렴하면서도 10년 넘게 연재된 그 이상한 소설의 의미를 깨달은 순간 평생 쏟을 눈물을 다 흘렸습니다…….

 

사람을 소비하는 이야기에 대해 날카롭게 풍자하는 동시에,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에 대해 말하는 잔인하고 아름다운 작품. 그래서 사실 이 작품은 ‘독자(獨子)’와 ‘소설’의 사랑, 그리고 ‘독자(讀者)’와 ‘소설’의 사랑을 그린 거대한 로맨스물로 읽히기도 한다. 부모이자 친구이자 연인이기도 한 소설이라니, 독자에게 이렇게 낭만적인 이야기가 또 어디 있을까. 마지막 편에 달린 한 댓글로 제 마음을 대신 전합니다. ―당신의 ‘독자’일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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