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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

[그공사] 유년시절 01

by 뀽' 2018. 8. 20.

- 시아트리히가 독을 마시기 전 나름대로 평화롭고, 한편으론 위태로웠던 어린 날의 노아가 보고 싶어 쓴 망상글

- 공작저 94화, '술창고' 에피소드 관련. 19살 시아트리히와 12살 노아 이야기.

- 당연히 주관적 캐해석과 날조로 가득함




유년시절 01




그러니까 평소라면 하지 않을 짓이었다.


"내가 장담하는데 말이야, 이쪽 창고에 있는 게 제일 맛이 좋아."


7살이나 더 먹은 제 형님이, 7살 아래인 자신보다도 더 무모하고 철없고 대책 없는 인간이라는 건 원래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의 장난에 넘어가 또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치는 건, 평소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짓인데.


"작년에 성인식 치른 이 형님이 아우를 위해 각 술창고의 맛까지 구분하는 경지의 이르렀다는 거 아니냐."

"제 핑계 대지 마세요. 그리고 전 아직 성인식 안 치렀습니다."

"이제 12살이면 마음은 성인이라 할 수 있지, 암. 그리고 넌 이미 충분히 애늙은이야."


'어디 보자, 이게 좋으려나-' 뭘 알고서나 하는 건지 이 오크통 저 오크통을 되는 대로 두드려보며 소리를 듣는 형의 뒤통수는 영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이미 이곳저곳 머리를 갖다 대는 바람에 먼지투성이가 되어버린 남색 머리칼. 위기의식이라곤 전혀 없는 그 태평한 뒤통수에 대고 노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못해도 한 시간이면 찾아낼 겁니다."

"응? 뭘? 좋은 술?"

"...들킬 거라구요."

"그거 서두르란 얘기지?"


아니. 그 얘기가 아니잖아. 하지만 늘 그렇듯, 뻔히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노아는 더 이상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을 포기했다. 들킨다면 어차피 혼나는 것은 제가 아니라 형님 쪽이다.


"아! 요놈이 좋을 거 같은데."


통-통-, 유난히 맑은 소리가 나는 오크통을 찾은 시아트리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창고 구석으로 가 이미 여러 번 해본 듯 익숙한 품새로 맛보기용 나무잔을 들고 왔다. 왕세자 체면 따위 내다버린 지 오래인 제 형이 낡은 오크통 앞에 쭈그려 앉아 쪼르르- 술을 따르는 모습을 노아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들킨다면, 형은 이번엔 어떤 벌을 받게 될까. 얼마 전에 선물 받았다던 매를 빼앗길 지도. 그러면 그리 좋아하는 매사냥도 아마 한동안 못하겠지.


"으아, 좋다. 이거로 하자. 자자, 가만있어 봐."


'여기 있다-' 하며 그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둘둘 감싸고 있는 실크 스카프를 꺼내었다. 깨지기라도 하는 물건인지 그답지 않게 꽤 조심스레 스카프를 풀어내는 모습을 보며 노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형님, 설마.."

"이거 빼돌리느라 고생 좀 했지."


스카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신전의 대예배 때나 간혹 쓰이는 의식용 작은 크리스탈잔 두 개. 먼지 날리는 어슴푸레한 술 창고 안에서 유난히 깨끗하게 빛나는 잔이 꽤 이질적이었다.


"왜-"

"특별한 날인데, 특별한 잔에 마셔야 하지 않겠냐."


따지려던 말조차 막혔다. 괜시리 뜨거워지는 목울대에 노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오늘은 자신의 열두번째 생일이었고, 지금쯤 사람들은 사라진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을 것이며, 그러니 이렇게 왕성 구석의 으슥한 술창고에 숨어 제 반쪽짜리 형의 바보짓을 상대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노아,"


먼지투성이가 된 남색 머리. 그 손이 내미는 깨끗한 잔. 난생 처음 맡아보는 퀴퀴한 포도주 향. 눈앞의 저를 오롯이 직시하며 웃는 황금색 눈.


"생일 축하해."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 저 눈 때문이다. 이상하리만치 목이 메어서, 노아는 간신히 예, 라고 작게 대답했다. 


어쩌면 이런 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라.




-


"생일 축하한다, 내 아들."


노아는 제 앞에 내밀어진 선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뜻 수수한 빛깔의 푸른 장미가, 온통 금빛 투성이인 선물더미 중에서 오히려 가장 화려해 보인다고, 노아는 생각했다. 푸른 장미 같은 건 원래 없거늘. 이 빛깔을 내기 위해 특별히 마탑에 부탁하셨을까?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왱왱 울리는 홀 안에서, 저도 모르게 슬쩍 고개를 돌려 저편에 계신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흑단 같이 검은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리고, 푸른 눈을 빛내며 쏟아지는 축하의 말들을 저 대신 받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기적. 포기하지 않는 사랑.


푸른 장미의 꽃말이 그랬던가. 언젠가 사촌 로버트가 제 친우 샤말 영식이 알려주었다며 떠들어대던 쓸데없는 소리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노아. 내 자랑스런 아들. 오늘은 정말 중요한 날이란다.'


긴장과 흥분으로 평소보다 높았던 어머니의 목소리. 어느 때보다 빛나던 그녀의 푸른 눈. 넓은 홀 안을 꽉 채운 화려한 사람들. 빛나는 샹들리에. 그 아래 차곡차곡 쌓여가는 선물. 그리고, 이 넓은 홀 어느 곳에도 설 자리가 없는, 초대받지 못한 사람. 그 사람과 꼭 닮은, 제 앞의 남자. 그 남자가 들고 있는 푸른 장미.


짧은 순간, 노아는 눈을 감았다 다시 떠, 저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는 한쌍의 황금색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분명 마주보고 있으나, 언제나 다른 곳을 응시하는 듯한 그 눈이 옅게나마 웃는다. 그 눈을 따라 미소 지으며, 노아는 준비해두었던 말을 꺼내었다.


"어머니가 보시면 정말 기뻐하실 거예요."


순간, 잘 정리된 깨끗한 남색 머리칼이 살짝 흔들렸다. 놀란 듯 조금 커졌던 금색 눈동자는 이내 부드럽게 휘었다. 보기 좋은 잘생긴 미소가 아버지의 입가에 떠올랐다. 


"그래."


늘 그래왔듯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짓는 그 미소에, 두 분께선 참 많이 닮았다고, 노아는 생각했다.





-


"생일 축,하한다는 말,이 잘도 나,오십니다."


또박또박한 듯 묘하게 어눌해진 말투로 중얼거리는 노아를 보며, 시아트리히가 작게 웃었다.


"그런 너는 내가 부른다고 니가 주인공인 자리에서 잘도 빠져나왔다?"

"안, 나가면, 오브라이언 영애가, 절 죽일 것, 같던, 데요."

"그럴 리가. 나오미가 얼마나 상냥한데."

"어차피 키이,스도 놀,리고 싶었,고.."

"...너 설마 뒷감당 키이스한테 시키고 나왔냐."


끄덕끄덕. 작지만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노아를 보며 시아트리히는 쯧, 혀를 찼다. 노아와 동갑내기인 키이스 웨스턴버그는 머리가 좋긴 하지만 시아트리히 기준으로는 쓸데없이 양심이 발달한 아이라, 거짓말을 하며 오래 시간을 끌어줄 되바라진 인간은 되지 못한다.


"그럼 확실히 생각보다 일찍 들킬지도 모르겠네. 아니, 대충 로버트나 저스틴이나 적당히 둘러대 줄 수 있는 양심 없는 인재들 니 주위에 많잖아? 왜 하필 그 고지식한 키이ㅅ... 너 설마 저스틴이랑 지난번에 싸운 이후로 화해 안 했어?"

"싸,운 게 아니고, 대련, 한 겁니,다."

"아니, 깔끔하게 무승부였다며 뭐가 문제야? 그만 화해하고-"

"안, 싸웠습,니다. 그리고 키,이스도, 쓸데없이, 머리는 파래서, 좀, 고생해봐야...."

"....."


뭔지는 모르겠지만 생일 파티가 열리는 홀 안에서 키이스가 노아의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한 걸까. 키이스가 그 올곧은 성격에 힘들어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에게 뒷감당을 시킨 것은... 음, 역시 제 동생이 성격이 나빠서겠지. 이제 취하다 못해 숫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어린 동생을, 시아트리히는 쪼그려 앉은 채 턱을 괴곤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지간히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네."

"....."

"좋아 보이면 데리고 나오지 말라고.. 나오미한테는 그렇게 얘기해뒀는데. 정말 어지간히 기분 나쁜 게 아니었던 모양이야."

"....."

"그렇다고 매번 그렇게 키이스 괴롭히면 못 써. 음, 재미있는 건 인정한다만."


건강에 안 좋다며 어른들이 금지한 간식 몇 가지에 손 좀 댄 걸 가지고 얼굴이 퍼래져서는 파르르 떨던 키이스는 확실히 좀 재미있었다. 본인의 머리색과 거의 비슷해질 정도로 새파랗게 질렸던 키이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혼자 웃던 시아트리히는 이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뒷감당이 좀 힘들단 말이지. 그 순진한 녀석 성격상 10분도 못 가 거짓말을 들켰을 테고."


꾸벅꾸벅. 독한 포도주 세 잔을 연거푸 마시고선 고개를 까딱이며 졸고 있는 동생은 그와중에도 신기할 정도로 앉아 있는 자세가 꼿꼿했다.


"중앙홀에서 여기까지 곧바로 달려오는 데에는 30분. 하지만 바로 이 술 창고인 줄은 키이스도 모를 테니 여기저기 뒤지는데 소요되는 시간 대략 20여분."


꾸벅, 조는 머리를 따라 함께 흔들리는 검은 머리칼. 그 여자와 똑같은, 그 결 좋은 검은 머리칼에 시아트리히는 내심 웃었다. 그 여자, 지금쯤이면 얼마 전의 그 키이스만큼 새파래진 얼굴로 노아를 찾고 있으려나.


"우리가 여기 온 지 벌써 50분이 다 되어가니.. 동생아, 형님이 네 어머니 손에 죽기 1분도 채 남지 않은 거 같다."


제 예상이 맞은 것인지, 어느새 창고 밖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노아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들이 점점 가까워져 왔다. 그 중 간혹 섞여 들리는 제 이름에는 얼핏 들어도 선명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아아, 작은 일탈도 이렇게 끝인가. 한동안은 방 안에 갇혀 착한 척 얌전히 공부나 해야 할 듯 싶다. 그래도,


"생일 축하해."


네가 태어나서 형은 정말 기뻐.


쾅-! 커다란 소리를 내며 열리는 창고 문에도, 어느새 깊이 잠이 든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며 시아트리히는 웃었다. 오늘이 녀석에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생일이 되었기를.





-


사실은 영원히 고통받는 키이스가 보고싶었던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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