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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

[노아레리] 당신에게 눈이 멀어서

by 뀽' 2018. 10. 2.

- 그공사 79~80화, 레리아나를 의심하면서도 사랑하는 노아를 더 길게 보고 싶어서 쓴 망상

- 주관적 캐해석과 날조로 가득함




O me, what eyes hath Love put in my head,

아, 사랑이 내 머리에 어떤 눈을 심었기에

 

Which have no correspondence with true sight!

내 눈이 헛것을 본단 말인가

 

Or, if they have, where is my judgment fled,

아니, 제대로 본들, 내 판단력은 어디로 달아났기에

 

That censures falsely what they see aright?

잘 본 것들마저 잘못 판단한단 말인가


William Shakespeare, Sonnet 148




당신에게 눈이 멀어서





함정으로 기어들어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노아는 생각했다. 덜그럭거리는 값싼 보급용 검 손잡이를 고쳐 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사방에서 터지는 폭음과 광란에 빠진 사람들의 비명소리. 뒤따르는 기사들이 웅성대는 와중에도, 레리아나의 목소리만이 머릿속에 어지러이 울렸다.


「기사들을 데리고 수로로 가요.」


굉음과 인파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한가운데서, 제 소매를 붙잡고 멈추어 섰던 그녀.


「이 테러 주모자들, 지하 수로에 있어요.


확신에 찬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걸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고. 어떻게 조금의 의심도 없이 확신할 수 있냐고. 왜 당신은― 


순간 제 소매를 붙잡고 있는 손이 얕게 떨렸다. 무수한 질문들은 입 밖으로 한 번 나오지도 못한 채 목울대 너머 캄캄한 가슴 속으로 다시 삼켜졌다.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가슴과 달리 머릿속은 새하얘진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자신을 늘 똑바로 직시해오던, 그가 사랑하는 그 아름다운 눈동자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냥 들어주세요.」


그녀의 이마가 제 팔에 힘없이 기대어온다. 가는 어깨가 잘게 떨고 있었다. 알고 있다. 이미 충동적이고, 맹목적인 데다, 어리석기까지 한 남자가 되어버린 자신은 그녀에게 이길 수 없다는 걸. 제게 기댄 채 애처롭게 떨고 있는 가짜 약혼녀의 등을, 노아는 다정히 쓰다듬어 주었다.


「먼저 가 있어. 처리하고 따라갈 테니까.」

「조심해요.」


수로로 가달라고 부탁한 건 본인이면서, 떠나려는 그의 손을 붙잡은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불안과 초조, 걱정으로 물든 사랑스러운 얼굴. 저를 붙든, 그 차갑게 식은 손마저도 따뜻해서, 노아는 미소 지으며 그녀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괜찮아― 늘 해주던 말을, 오늘은 마음 속으로만 속삭였다.


믿을게. 

당신이 한 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으니까.




-


― 옥새는 공작님께서 가지고 계시니까요.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그녀는 틀린 적이 없었다. 권력도 인맥도 없다던 남작 가문의 영애는, 늘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들을 정확히 끄집어내 입에 담곤 했다.


― 반젤리오가 31번지에 공작가의 묘지가 있는 걸로 알아요. 그곳에 묻혀 있지요?


자신을 포함해 단 세 명만이 알고 있는, 정확히는 그 세 명만이 알고 있다 믿었던 장소를 아무렇지 않게 짚어냈던 그녀. 


― 게일 가문은 공작님 밑으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게일 가문을 이을 사람은 첫째인 발두르가 아니라, 둘째인 헤럴슨 게일일 테니까요.


게일 백작가의 속사정을 정확히 꿰뚫고 있던 것.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확신에 차 선언하던 말들.

― 왕국에서는 지금 AGI의 활동을 주시하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발두르는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에요.

발두르 게일이 과격파 무장 테러조직에 가입했다는 것이, 이렇게나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던가? 


콰쾅―! 순간 굉음이 울리며 경기장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그쪽에 남아있던 폭탄이 터진 모양이었다. 흙먼지 속 피맺힌 비명들이 귀 아프게 울렸다. '고, 공작님!' 뒤따르던 신입 기사가 놀라 어쩔 줄 모르겠단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두르지."


지하 수로를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허리춤에 찬 검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 계약에 따라 옥새에 관한 모든 사실은 함구할 것입니다. 단 6개월, 6개월만 약혼자 흉내를 내주신다면, 그 이후에는 공작님 인생에서 깨끗이 사라져드리겠습니다.


애초에 옥새에 관한 건 어떻게 안 것일까. 그걸 빌미로 제게 약혼을 제안하며 접근한 이유는, 정말로 프렌치 브룩스 때문이었나? 게일 가문에 관해선 어떻게 그렇게 상세히 알고 있었을까. 발두르 게일이 AGI 소속이라는 건 어디서 들은 거지? 인맥도 없고 외출도 잦지 않다는 남작 영애가 이 모든 것을 혼자 아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 이 테러 주모자들, 지하 수로에 있어요.


대체 당신이 어떻게 그들의 행방을 알고 있는 걸까. AGI가 지금 지하 수로에 있다는 걸, 테러가 그들이 벌인 짓이라는 걸, 발두르 게일이 그곳의 조직원이라는 걸, 당신은 어떻게… 


이 일이 끝나면 다 말할 테니까.


당신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잠시 눈을 감았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프렌치 브룩스가 그녀를 죽이려하는 걸 직접 목격까지 했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해 줄 만한 권력자를 찾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눈치 빠르고 영민한 여자이니, 옥새에 관한 정보도 그저 시아트리히와 제 관계를 어림짐작하곤 떠본 것이리라. 게일 백작가의 일도, 사실 알 사람은 다 아는 소문 아니었나. 관심이 있었다면 그런 정보들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배후 같은 건 없어. 다른 목적 같은 게 있을 리 없어. 이미 충분히 뒷조사도 했잖아? 그러니까,


― 미안해요, 노아.


그러니까 제발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로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  




-


O, how can Love's eye be true, 

That is so vex'd with watching and with tears? 

 

아, 지새움과 눈물로 흐려진 사랑의 눈이 

어찌 진실을 볼 수 있겠는가?




-


눈이 먼 게 틀림 없다.


아버지를 보며, 그리 생각했었다. 눈이 먼 게 아니라면, 눈앞에 뻔히 보이는 진실을 그렇게나 완벽히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원하는 건 오로지 권력 뿐이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왕국에 단 한 명도 없었을 텐데. 당신께서도 모두 아셨을 거면서, 왜 그토록 처절하게 모른 척을 했을까. 


「어머니께 대신.. 가져다 드리겠니, 노아?」


리시안셔스 향기가 지독했다. 그걸 제앞에 내미는 아버지의 눈은 더 지독했고. 


아버진 늘 초조해하셨다. 어머니가 당신을 떠나실까봐, 그래서 영영 돌아오지 않으실까봐. 사랑에 눈이 먼 아버지는 늘 불안에 떨었다. 아버지의 눈에는 수군거리는 다른 사람들이, 절름발이가 되어버린 형이, 그리고 당신을 원망하는 내가 비치는 일이 없었다. 충동적이고,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그 눈은 오로지 한 여자밖에 볼 줄 몰랐다. 


― 노아, 사랑해 본 적 있어요?


먼 기억 속 그녀의 목소리가 울린다. '아니.'  기억 속 자신은, 그녀를 바라보며 그리 대답했다. '난 왕족에 공작이니까.'  그러니까 아버지처럼 그렇게 눈이 멀면 안 돼. 펑― 밤하늘에 불꽃이 터진다. 하얀 빛무리가 그녀의 얼굴에 소복이 내려앉았다. 


― 그쪽 사람들은 사랑도 안 해요?


미간을 찌푸리는 표정이 귀여워서, 그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보트 안을 가득 채운 꽃향기는, 그리 지독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대답했다. '안 해.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왕비는 지난 왕세자 독살 시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커다란 리스크를 지게 되거든.'  눈이 멀어서 앞이 안 보이게 되면, 뻔히 보이는 함정 안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 끝도 없는 낭떠러지 밑으로 추락하게 되겠지. 불어오는 강바람. 꽃향기를 타고 불꽃놀이의 화약 냄새가 희미하게 퍼진다. 동그란 눈이 깜빡였다. 나비 같은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 그래도 곧 누군가를,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늘 그래왔듯,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 사랑하게 될 거예요.


펑― 터지는 불꽃, 어른거리는 빛 아래, 끌어안은 무릎에 볼을 댄 그녀가 웃었다.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만다. 


― 두고 보세요. 게일 가문 일도 제가 맞았잖아요?



쾅-! 폭음과 함께 상념에서 깨어났다. '경기장 쪽에서 폭탄이 또 터진 모양입니다-', ' 대체 손에 넣은 폭약이 양의 어느 정도인 건지-'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매캐한 흙먼지에 섞여 화약 냄새가 풍겨왔다. 말없이 걷던 노아는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새, 수로 앞이었다.


"알파는 1구역, 베타는 2구역으로 나눠 들어간다."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주며 베테랑 기사들을 먼저 들여보냈다. 이제 이곳에 남은 건 자신과 신입 기사 한 명,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는 헐겁고 무딘 검 하나. 검을 꺼내어 잡곤, 저를 향해 새까만 입을 벌리고 있는 제3구역 입구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나와 같이 가지."


'옛!' 군기 들어간 신입 기사의 대답이, 어두운 지하 수로 안에 메아리쳤다. 그날의 아스라이 들리던 불꽃놀이 소리와 향긋한 꽃내는 더 이상 없다. 폭탄과 비명, 피비린내. 그리고 그마저도 보이지 않는 제 앞의 캄캄한 길을 바라보며, 노아는 자조하듯 웃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어. 망설임은 없었다. 빛 한줄기 없는 어두운 터널 속으로, 그는 기꺼이 걸어들어갔다.




-


그래. 당신이 한 말은, 정말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으니까.


당신 말처럼 나는 결국 사랑에 빠졌고, 

당신에게 눈이 멀었고, 

그러니까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해도 이제는……


정말로 어쩔 수 없어.






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공작님 불행회로가 타들어가다 못해 폭발하던 공작저 79~80화를 제가 진짜 좋아합니다<< 

손에 꼽게 좋아하는 파트라 잘 써보려고 몇 번을 갈아엎었는데도 답이 없어서 걍 마무리..


서두와 중간에 인용한 구절은 셰익스피어의 그 유명한 148번 소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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