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ritings

[그공사] 유년시절 02

by 뀽' 2018. 8. 23.

- 어쩐지 데면데면한 노아와 저스틴 어린시절 보고 싶었음

- 저스틴 돌보는 보모(...) 네이슨은 더 보고 싶었음

- 그래서 어쩌다보니 전지적 네이슨 시점

- 주관적 캐해석과 날조로 가득함





유년시절 02





"한 번 더!"


호기 있게 외치는 소리에 네이슨은 젠장, 입새로 새어나오는 욕지거리를 애써 삼키고 자세를 바로 잡았다. 흙먼지 날리는 연무장. 제 앞에서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검을 겨누고 있는 상대는 저보다 5살이나 어린 소년이다.


"간다?"


이미 몇 차례 흙바닥을 굴렀는데도 한낮의 태양빛을 그대로 반사해내는 소년의 백금발이 눈부시다. 제 푸르죽죽한 머리―언젠가 제 여동생은 죽은 풀색 같다 한 적도 있다―는 볼 필요도 없이 엉망일 텐데. 날 때부터 귀족인 치들은 모두 저런 것일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느라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순간,


"딴 생각!"


눈 깜짝할 새 성큼 거리를 좁혀 들어오는 날카로운 검날. 반사적으로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기합을 넣듯 네이슨은 우렁차게 외쳤다.


"항보옥!!!"

"뭣-"


'으악-' 마차가 급정거하는 듯 끼이익- 소리가 나는 동시에 아슬아슬하게 공격이 멎었다. 잠시 사태파악이 되지 않는 듯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있던 소년은, 이윽고 그 곱상한 얼굴을 바짝 쳐들고 네이슨에게 소리를 쳤다.


"뭐야! 왜 갑자기!"

"갑자기? 갑자기요? 휴가 날 아침부터 난데없이 대련하자고 불러서 3시간 넘게 흙바닥 구르게 만들고선, 갑자기요?"

"자고로 기사가 훈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네, 네이슨. 늘 겸손하고 부지런히 정진해야-"

"진중한 척 하지 마세요. 그리고 매번 오전 훈련 빼먹던 샤말 영식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냥 저스틴이라고 부르라니까."


갑자기 중단된 대련에 어이없다는 듯 소리칠 땐 언제고, 금세 또 넉살 좋게 웃는 저스틴에 네이슨은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말대꾸를 할 힘도 없어, 고개를 젓곤 그대로 뒤를 돌아 나무 그늘이 있는 쪽을 향한다. 터벅터벅, 힘 빠진 걸음마다 축 처져 있던 녹색 머리칼 몇 가닥이 팔랑거리는 게 조금 우스워 저스틴은 작게 웃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꼬박꼬박 말 높일 거야? 네이슨이 평민인 것도 아니고, 나보다 다섯 살이나 위면서."

"나이 공격은 하지 맙시다."

"얼마 전에 정식 기사도 됐잖아? 따지자면 오히려 내 쪽이 네이슨한테 말을 높여야 한다고. 아시겠습니까, 네이슨 경-"


움찔. 작게 떨리는 어깨를 보니 오, 이번 높임말 공격은 유효타였군. 저스틴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그 뒤통수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구겨진 인상으로 네이슨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을 마주한 저스틴이 진심으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지금 진짜 못생겼어 네이슨."

"보태준 거 있으십니까!!!"


빼액 소리를 지르는 네이슨에 저스틴은 결국 하하, 크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아직은 어리고 작은 손이 저보다 머리 두엇은 훌쩍 큰 기사의 머리 위로 다가간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조금 숙인 네이슨의 귓가에, 유쾌한 소년의 목소리가 재잘댔다.


"그럼, 보태준 거 있지."


까치발까지 들고 선 저스틴은 네이슨의 머리에 묻은 흙을 슥슥 털어냈다. 


"지금 막 덜어내는 중이고."

"알긴 아시네요."

"하하- 미안 미안. 점심 푸짐하게 차리라고 할 테니까 먹고 가."


하여간 미워할 수가 없는 소년이라고 네이슨은 생각했다. 샤말 후작가의 장남. 화려한 외모. 천재적인 검술 실력. 무엇 하나 평범한 것이 없는, 저 위쪽 세계에 사는 그가 저를 이리 격식 없이 대하는 것은 사실 무척이나 신기한 일이었다.


계급제가 폐지된 지는 이미 오래였으나, 대대로 최상위 카밀란 계급이었던 샤말 후작가다. 네이슨은 이 저택을 처음 방문했을 당시 에스토타 계급인 자신을 쳐다보던 이 댁 영애의 얼굴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거기엔 그 아이가 고작 여덟 살임에도 넋이 나갈 정도로 굉장한 미모를 자랑했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강렬했던 것은 그녀가 자신을 '내려다보던' 시선이었다. 


딱히 그 시선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든가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쪽이 훨씬 익숙했다. 당황스러운 것은 그 영애 쪽이 아니라 오히려-


"그나저나 바로 근위대 1사단 발령이라니. 바빠질테니 나랑 대련할 수 있는 시간도 줄겠네."

"그렇죠. 바쁩니다. 아주 많이 바쁠 예정이에요."

"그냥 우리 가문 기사로 들어오는 건 어때."


늘 이렇게 거리낌 없이 구는 이 도련님이 더 곤란하다. 어쩐지 또 그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것 같아, 네이슨은 화끈하게 대화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근데 왜 갑자기 영식답지 않게 훈련에 열심이십니까?"


그의 제안에는 대답도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지만 네이슨은 안다. 이 도련님은 절대, 절대로 따지지 않는다. 자수정 빛의 동그란 눈이 잠시 커졌다가, 두어 번 깜빡이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나 지금 열심히 한다고 혼나는 거야?"

"아니, 혼나는 건 제 쪽인 거 같은데요. 오늘 누가 더 많이 굴렀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음… 글쎄……."


시덥잖은 대화에 기꺼이 어울려 준 저스틴은 정말로 제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생각하는 척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이 어쩐지 얄미워 네이슨은 오전 내내 구르면서 벼르고 벼르었던 말을 결국 꺼냈다.


"2왕자님께 져서 그래요?"

"안 졌어!!! 비겼다고! 무승부!"


오.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것 중 역대급으로 큰 목소리였는데? 11살 주제에 도통 소리 지를 줄 모르던 유들유들한 귀족 도련님이 눈을 치켜뜨며 마치 저처럼 빼액 소리 지르는 모습에, 네이슨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큭큭댔다. 본인도 조금 민망했는지 저스틴은 크흠, 큼, 목을 가다듬더니 부러 한껏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네이슨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 봤잖아. 무승부였어."

"아, 네, 무승부. 왕자님이 이긴 무승부였죠."

"뭐야 이제 왕실 근위대라고 왕자님 편드는 거야?"


반은 장난이지만 반은 진심인 듯 묘하게 섭섭하다는 투로 저스틴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잠시 말문이 막힌 네이슨은 저도 모르게 제2왕자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그림처럼 우아한 미소를 짓고 있던, 고요한 소년. 그 날 네이슨은 사람이 저렇게 초상화에서 갓 튀어나온 것처럼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


사람이 이렇게 생길 수도 있구나.


"받을 수 없어."


단호한 내용과 달리 말씨는 어찌나 부드러운지. 분명 거절의 말인데도 감사하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러나 제 앞에 서 있는 저스틴은 다행히 저와 달리 귀가 제대로 일하고 있던 모양이다.


"다른 의미 없는 순수한 생일 선물입니다. 그 아이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전하는 건 부끄럽다하여 이렇게 따로 드리는 것뿐이니 그냥 받으셔도 된다니까요."

"샤말 영애께는 나를 대신해 사과를 전해줘."

"비비안도 왕자님께 큰 거 바라는 거 아닙니다, 그냥 선물 한 번만 받아달란 건데-"

"더 이상 용건 없으면 이만 가볼게."


체이머스 왕국의 2왕자, 노아 벌스테어 체이머스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 네이슨은 조금 신기한 기분이었다. 열두 번째 생일이 며칠 후라 들었는데, 풍기는 분위기는 도무지 열두 살 같지가 않다. 인사를 하고 망설임 없이 돌아서서 멀어지는 걸음걸이 하나조차 지극히 귀족스러웠다.


"내가 뭐랬어, 안 받는댔잖아."


제 저택 정원에서 만남의 자리를 마련해 주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로버트 윈나이트 소공작이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노아 형은 개인적으로 들어오는 선물 절대 안 받아."

"……."

"그리고 그거 초콜릿이지? 노아 형 단 거 안 먹는다. 그러니까 줬다 치고 그거 우리가 나눠 먹자."


열두 살 짜리가 단 걸 안 먹는다니. 원래부터 먼 사람이지만 어쩐지 더 멀어진 기분에 네이슨은 흐린 눈으로 노아의 뒷모습을 보다가 로버트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노아의 사촌이자 저스틴의 친우인 로버트는 어느새 반짝거리는 눈으로 저스틴의 손에 들린 선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저게 보통이지. 저게 저 또래의 일반적인 모습이지, 암.


그러나 저스틴은 로버트의 말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멀어져 가는 노아의 뒷모습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네이슨은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화가 난 걸까? 제 동생의 마음이 이렇게나 매몰차게 거절당했으니, 역시 화가 난 거겠지?


그간 노아 왕자님에 관해 저스틴과 로버트를 통해 전해들었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저스틴은 노아와 잘 맞지 않았다.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좋은 것도 아닌. 그저 사이에 로버트라는 공통 인맥을 둔 애매모호하고 어색한 또래. 뭐가 문제인 걸까. 네이슨이 저스틴의 시선을 따라 다시 노아의 뒷모습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순간,


"그럼 저랑 대련합시다, 왕자님!"


응?


"대련해서, 이기는 쪽 말을 듣는 거로 하죠."


뒤돌아 가던 노아가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어 섰다. 천천히, 그의 고개가 이쪽을 돌아본다. 저를 포함해 근처에 서 있던 근위기사들이 쩡 얼어붙었다. 짧은 시간, 정적이 흘렀다.


"아니, 야, 잠깐만, 미쳤어?"


오 신이시여. 네이슨은 이 순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줄 수 있는 고위 귀족 소년이 있음에 감사했다. 그러나 사색이 되어 말리는 로버트는 보이지도 않는지 저스틴은 기어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참고로 왕자님이시라고 봐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야!' 로버트는 이제 아예 저스틴의 입을 제 손으로 직접 막을 생각인지 난리였다. 근위기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노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네이슨은 그저 가만히 서서 지난주 신전에 낸 기부금 액수가 적었던 것인가 하는 짧은 후회와 함께, 샤말 가와 자신의 친분 관계를 왕자님이 모르시기를 맹렬히 빌었다. 저 같이 존재감 없는 신입 기사의 인맥까지는 모르실 거다, 제발 모르게 해주세요, 다음 주엔 더 많이 기부하겠습니다, 신이시여 제발-


피식. 순간,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좋아."

"어?"


다행히도 저 얼빠진 소리를 낸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제 마음의 소리를 대신 내 준 로버트 윈나이트를 네이슨은 ―비록 자신이 신관은 아니지만―마음 속으로 경건하게 축복했다.


"네가 이기면, 말을 들어주지."


나긋한 목소리가 정적 속 바람을 타고 실려왔다. 온통 무채색으로 칠해진 그림 같던 소년은 어느새 이쪽을 바라보며 금안을 형형히 빛내고 있었다. 네이슨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거리가 있어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네이슨은 어쩐지 노아가- 


"그리고 나도, 네가 동생이라고 봐줄 생각 없어."


노아가 이 상황을 재미있어 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


대련은 생각보다 싱겁게 종료됐다. 어쩐지 로버트가 조용해졌다 싶더니 어느새 가서 제 어머니, 그러니까 윈나이트 공작부인을 불러온 것이다. 대련이 시작된 지 15분 만에―네이슨 인생에서 가장 긴 15분이었다― 현장에 나타난 윈나이트 공작부인은 마음이 약하고 몸은 더 약한 사람이었다. 


"오 세상에…! 왕자님! 샤말 영식…! 이 무슨… 무슨……"


거의 혼절하기 직전의 사람처럼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윈나이트 공작부인의 비명에 노아와 저스틴은 즉각 대련을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놀란 저스틴이 부인께 달려갔고, 노아는 저택의 고용인들을 불렀으며, 그나마 곁에 있던 집사 기디언이 다리에 힘이 풀린 공작부인을 부축했다. 제 어머니가 이리 놀랄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로버트는 아연실색하여 연신 어머니만 불러댔다. 일련의 해프닝이 가까스로 해결된 것은 부인을 방에 모셔놓은 후, 노아와 저스틴은 그저 대련을 한 것일뿐 싸운 것이 아니라고 잘 설명드린 후였다.


"정식으로 연무장에서 입회인을 두고 대련했어야 하는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괜히 저 때문에 왕자님께서 더 놀라셨겠군요."

"아니요. 애초에 남의 집 정원에서 무도한 짓을 벌여 죄송할 따름입니다. 사람을 시켜 심신 안정에 좋은 차를 가져오라 일러두었으니, 이만 편히 쉬십시오."


차분하게 말하는 노아를 보며, 네이슨은 저것이 내일 모레 열두살 먹는 아이가 맞나 다시 한 번 의심해야 했다. 저스틴의 대련 신청을 받아들일 때엔 얼핏 치기 어린 평범한 남자애 같기도 했는데…. 슬쩍 저스틴 쪽을 돌아보니, 조금 전 공작부인이 잘못 될까 많이 놀랐던 탓인지 저스틴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싹 가셔 있었다. 그저 여동생의 선물을 대신 전해주고자 온 것이고, 어쩌다보니 대련을 하게 된 것에 불과한데 왜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네이슨은 저스틴이 조금 가여워졌다.


마중 나오지 않으셔도 된다, 이만 쉬시라 공작부인께 이른 후 일행은 방에서 나왔다. 저스틴은 그간 숨을 참았던 사람처럼 길게 심호흡을 하더니,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노아를 향해 돌아섰다. 


"오늘… 여러모로 폐를 끼쳤습니다."

"아니. 나도 잘못한 거니까."

"왕자님이 안 계셨다면 이리 빠르게 대처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둘 사이 오가는 말들에, 한발짝 뒤에 서 있던 네이슨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원래 이맘때의 남자애들은 좀 치고 박고 싸우고 하면서 친해지는 거다. 그동안은 누가 먼저 어떻게 다가갈 지를 몰라 어색하게 지낸 거고, 이번 일을 계기로 서로 마음을 터 놓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네이슨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인지, 평소의 가벼운 태도는 어디가고 저스틴은 더할 나위 없이 진중한 눈빛으로 노아에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대련은… 이렇게 중단되었지만, 다음엔 꼭…."


저스틴의 말에 노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래, 그렇게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친구이자, 끊임없이 향상심을 자극해 서로 발전해나갈 수 있는 발판이 되어-


"다음?"


이 왕국을 지탱하는 정의로운 기사로 성, 장-


"내기는 이미 끝난 거 아닌가?"

"……예?"


……예? 네이슨은 하마터면 저스틴과 함께 얼빠진 소리를 낼 뻔 했다. 대화의 흐름을 종잡을 수 없어 눈만 껌뻑이고 있으려니, 노아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그림처럼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네가 '이기면' 말을 들어주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상대가 모르는 것을 다정하게 짚어 설명해주는 말투가 사뭇 친절하다. 저스틴이 눈을 깜빡였다. 네이슨도 눈을 깜빡였다. 따지고 보면 그랬다. 노아는 저스틴이 '이기면' 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대련은 무승부. 이긴 쪽은 없다. 그러니-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왜 화를 내는 거지?"


무슨 일이냐는 듯 태연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노아를 보며 네이슨은 그제야 깨달았다.


졌다.


처음부터 진지하게 승부를 낼 생각 같은 건 없었던 거다. 그곳은 윈나이트 저택의 정원이었고,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았으며, 누구 하나라도 달려가 집안 어른을 모셔오면 끝나는 게임.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저-스-틴, 샤-말!"


이 자리에 불려온 어른이 윈나이트 부인 한 명이 아니었다는 것.


"……어, 어머니?"


홀 저편에서부터 울리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저스틴 뿐 아니라 네이슨까지 뒷머리가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뻣뻣해진 두 사람을 보며 노아는 더없이 다정하게 웃었다. 


"아까 보니 샤말 영식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아 이 집 집사에게 특별히 부탁했네. 샤말 부인을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졌다. 완전히 졌어.


그렇지 않아도 귀족으로서의 품위와 기품을 중요시하는 샤말 부인에게 늘 혼나는 자유분방한 장남이다. 노아에게 우아하게 인사를 올리곤 저스틴을 끌고 나가는 샤말 부인의 뒷모습을 보며, 왕실 근위대 신입 기사 네이슨은 저스틴이 불쌍해서 나오는 탄식일지 그래도 당하는 게 내가 아니라 다행이다 하는 안도일지 모를 한숨을 남몰래 내쉬었다. 그 순간,


"네이슨."

"예, 예…… 예?!"


천둥처럼 내리꽂히는 다정한 목소리에 네이슨은 발작하듯 대답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왕자님께선 예의 그 평온하고 상냥한 미소를 지은 채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계신 거지? 그런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마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노아는 덧붙였다. 


"네이슨..이라고 부르는 걸 들었는데. 아닌가?"

"예? 아니, 그, 예, 예, 맞습니다!"

"그래, 네이슨. 샤말 영식을 따라가도록 해."

"……예?"

"자네 말고도 내 호위를 맡을 근위 기사는 세 명이나 있으니. 그리고……"


살짝 가늘어진 황금색 눈이 네이슨을 가늠하듯 잠시 쳐다보더니, 이내 부드럽게 휘어졌다.


"샤말 영식과 아주 각별해 보이던데. 가서 위로해줘야지."





-


"응? 네이슨, 추워?"


네, 춥습니다. 저의 미래가 춥네요. 


왕족을 지키고자 왕실 근위대에 들어갔는데 왕족이 너무 무섭다. 둘째 왕자님이 무섭고, 착한 둘째 왕자에 비해 못 말리는 악동이라는 왕세자 전하도 무섭다. 과연 그들에게 근위 기사가 필요할까? 근위 기사가 필요한 건 자신이 아닐까?


"왕실 근위대고 뭐고, 역시 전 영식 옆에 있는 게 제일 편한 거 같습니다."

"하하 다행이야. 난 또 네이슨이 변심해서 왕자님 편으로 돌아선 줄 알았지."


'그렇다고 사표 쓰고 나오면 안 돼, 나중에 근위대 은퇴하면 그때 받아줄테니까 하하-' 어느새 저를 따라 흙바닥에 아무렇지 않게 주저앉아 이야기하는 저스틴을 보며, 네이슨은 역시 이쪽이 편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역시 취직을 잘못한 게 아닐까……."

"왕자님 때문에 겁 먹었나봐 네이슨?"

"……."

"하하, 너무 그러지 마. 그 날은 왕자님이 유달리 화내신 거니까."

"……예?"


화를…… 냈다고? 왕자님이 웃으면서 사근사근 얘기했던 기억 밖에 없는데?


"화내실 만도 했지. 거절하는데도 계속 받아달라 붙잡는 게 한 두번이 아니었으니."


…그렇구나. 화를 내신 거였구나. 네이슨은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싫다고 거절하는데 계속 다시 시도하는 것도 대단하네요."

"그치? 비비안은 대단해. 누군가를 그렇게 좋아하면 그런 용기가 나오는 걸까."


아니. 방금 건 조금 돌려깐 거였는데. 그리고 정말 좋아한다면 상대방 입맛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네이슨은 이를 입 밖으로 꺼낼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다른 쪽을 칭찬하기로 했다.


"영식도 용기 있는 좋은 오라버니십니다. 여동생을 위해 그 자리에서 왕자님께 대련까지 신청하시고."

"응?"


네이슨의 말이 의외라는 듯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던 저스틴은, 조금 바람 빠진 웃음 소리를 내었다.


"뭐, 우리 예쁜 비비안을 그렇게 대놓고 거절하시는게 좀 괘씸하긴 하지만, 어차피 그건 왕자님 취향 문제니까 별 상관은 없어."

"예?"

"취향이 나랑 겹치는 것만 아니면 상관 없잖아?"


하하하 웃는 저스틴을 보며 네이슨은 그게 웃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왕자님과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니. 들키는 그 날로 암살당할 것이 분명하다. 가만, 그런데 샤말 영애 때문이 아니라면 왜 굳이 그날…….


"그게 아니면 왜 대련을 신청하신 겁니까?"

"그냥 궁금했어. 내가 얼마 전에 검기를 다룰 수 있게 됐잖아? 그런데 알고보니 왕자님께서도 이미 1년 전에 검기는 자유자재로 다루셨다 하더라고."


네이슨은 저스틴이 편하다고 여겼던 생각을 조용히 취소했다. 


"사실 그동안은 좀 재미없는 분이라 생각했는데. 아버지께서 워낙 친하게 지내라 성화시니까 더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던 것도 있고."

"아… 네……."

"그런데 대련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


아… 네…… 그렇구나……. 쏟아지는 딴 세상 이야기들을 네이슨은 영혼 없는 반응으로 받아쳐냈다. 왕자님께서 1년 전에 검기를 마스터하셨구나. 나도 1년 전에 마스터했는데. 똑같네? 따위의 부질 없는 생각을 하며 어쩐지 아픈 마음을 달래본다.


"하긴, 왕세자 전하 생각하면 왕실이라고 그렇게 막 따분한 건 아니야, 그렇지?"


왕세자 전하를 제대로 뵌 적은 아직 없지만, 따분한 편이 좋지 않을까 하고 네이슨은 생각했다. 따분한 성격이라면 적어도 동생 생일날 그 동생 납치하고 술을 먹여 기절시키는 일 같은 건 없을 테니까. 바로 어제, 둘째 왕자의 탄생일 파티에서 주인공인 왕자가 사라져 온 근위대가 난리 났던 걸 떠올리니 새삼 두통이 몰려오는 네이슨이었다. 역시, 아직 가까이에서 뵙진 못했지만 왕세자 전하는 무섭다. 무서운 사람이다. 가까이 해선 안 될-


"그래도 가까이 가긴 싫어."


제 마음의 소리가 저스틴의 입에서 나와 네이슨은 흠칫했다. 그러나 저스틴은 어느새 제 생각에 빠져 있는지, 네이슨의 반응은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답답하잖아. 고작 술 좀 마셨다고 근신이라니. 평소에 어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네이슨 같은 못생긴 근위 기사들이 수두룩 빽빽 쫓아다니고." 

"……."

"그냥 다 때려치우고 여행이나 다니고 싶다."


어쩐지 논리 없고 맥락 없는 말들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네이슨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제 5년 남았네……."

"…예."

"내 적성엔 치안대 쪽이 나을 거 같지만, 그럼 아버지가 많이 화내시겠지?"


왕국에서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는 최저 연령은 16세. 또래는 물론, 형 누나들보다 월등히 뛰어났던 네이슨도 만 16세를 꼭 채우고 왕실 근위대에 들어간 데에는 나이제한이 그 이유였다. 올해 11살인 저스틴에게는, 이제 5년 남았다.


네이슨이 보기에도 어딘가에 매여있는 것을 싫어하고 다소 제멋대로인, 하지만 누구와도 격식 없이 잘 어울리고 다정한 저스틴에겐 근위대보다 치안대가 잘 맞아보였다. 그러나 후작은 근위대를 원한다. 그는 그의 아들이, 딸이, 그의 가문이 왕좌에서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 다정한 도련님은, 결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다. 네이슨은 쓴 침을 삼키며 위로같은 말을 찾으려 애썼다.


"근위대도 잘 맞으실 겁니다."

"그럴까…. 하긴, 내가 단장되서 분위기 바꾸면 되겠다."

"……아, 네. 그렇겠네요."


네이슨이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저스틴이 웃었다. '뭐야, 네이슨. 내가 근위대 단장 못될 거 같아?' 장난스럽게 묻는 저스틴에게 네이슨은 차마 '아니요. 되시고도 남는데 당신 같은 한량이 단장이 되면 밑에 사람들이 고생할 것 같아 그렇습니다'하고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어딘가 오묘한 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는 네이슨에 저스틴은 한참을 더 웃더니 크게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점심 먹으러 가자, 네이슨."


오후 햇살을 등진 채 활짝 웃는 소년이 눈부시다. 말도 안 되게 강한 주제에 어딘지 모르게 유약해서,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늘 이 도련님의 페이스에 제가 말리는 걸까. 


'아아, 배고프다-' 전혀 귀족답지 않은 모양새로 크게 외치며 식당을 향해 가는 저스틴에, 네이슨은 그제야 조금 편하게 웃었다. 저스틴은 분명 근위대 기사단장이 될 것이다. 지금은 저렇게 고민하지만 일단 단장이 되면 늘 그래왔듯 잘 적응하겠지. 저 한량 같은 성격 때문에 밑에 사람들이 고생하긴 하겠지만-


뭐 어떤가. 내 직속상관만 아니면 되지. 







-


그리고 저스틴은 네이슨의 직속상관이 된다.

굴러라 네이슨! 힘내라 네이슨!


근위대와 치안대의 분위기가 역전되는 것은 시아트리히가 왕좌에 오른 이후가 아닐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