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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

[노아레리] 시선

by 뀽' 2018. 9. 17.

- 노아레리 첫만남을 노아 시점에서 보고 싶어서 쓴 망상

- 그공사 본편 3, 4화에 해당하는 부분

- 주관적 캐해석과 날조로 가득함





귀찮게 됐군.


뒤따르는 기척을 느끼며 그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혀를 찼다. 무도회장에서부터 따라붙던 집요한 시선 하나가 기어코 정원까지 그를 따라나섰다. 차라리 사람들 사이에 섞여 말을 걸었다면 적당히 응수하며 넌지시 거절했을텐데, 멀리서 말 한마디 없이 맹렬히 바라만 보다가 이렇게 뒤쫓아오는 것은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소극적인 건지, 아니면 오히려 적극적인 건지.


자박자박, 부드러운 잔디를 밟는 발소리만 울렸다. 여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먼저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는 건가. 어느 쪽이건 한 번쯤 기회를 주기로 했다. 나타난 갈림길에서 노아는 망설임 없이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보다 깊숙한 밤의 정원, 장미 덩굴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곳으로.


웃고 떠드는 무도회장 소리가 멀어질수록, 조용한 풀벌레 소리가 달빛 속에 서서히 차올랐다. 장미 내음 가득한, 인적 없는 분수대. 이만하면 적당한 장소라 생각하며, 그는 뒷짐을 지고 걷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뒤따르는 발걸음이 그에 맞춰 느려졌다. ..역시 소극적인 쪽인가. 더 시간을 끄는 건 곤란한데. 결심이 서, 그는 이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끈질기게 저를 바라보던 그 시선을 마주했다.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시선





동그랗게 커진 연녹색 눈동자가 두어번 깜빡였다. 저요?라고 말하는 듯한 모양새. 당황한 것인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채 틀어올리지 않은 밝은 갈색의 옆머리가 팔랑댔다. …어쩐지 조금, 어린 동물 같다는 다소 쓸데없는 생각이 스쳤다. 


말없이 조금 기다리고 있자니 곧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챈 여자가 '아.'하며 다시 제쪽을 바라보았다. 


"윈나이트 공작님, 여신의 손길 안에서 평안하시기를. 저는 존데인 맥밀런 남작의 여식, 레리아나 맥밀런입니다."


살짝 무릎을 굽히며 인사하는 품새는 의외로 단정했다. 맥밀런 남작이라.. 신귀족파, 석유사업가, 자본력은 있으나 딱히 정치권에 영향력은 없음, 따위의 정보를 무미건조하게 되새기며 그는 다정하게 웃었다. 


"맥밀런 영애, 평안하시기를. 노아 윈나이트 공작입니다."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히 인사하면, 마주하고 있는 눈동자가 조금 움찔한다. 긴장하고 있는 것이 뻔히 보였다. 딱히 겁을 줄 만한 행동은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어지간히도 소심한 영애라 생각하며 그는 조금 더 표정을 풀었다. 지금 할 일이 있는 그로썬 이런 사소한 일들은 최대한 조용히 넘기고 싶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건지 그녀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치맛자락을 잡고 있는 작은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재촉하지 않았다. 단지 평소보다 조금 더 자상한 얼굴로, 그녀가 다시 입을 열기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전하고자 하는 말을 들어주고 부드럽게 달래어 돌려보내면 될 것이다. 


그리 생각하는 순간,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반짝이는 연녹빛 눈동자. 아― 


"거래를 청하고 싶습니다."

"……거래요?"


잠깐의 정적. 생각지도 못한 말에, 그는 답지 않게 되묻는 짓까지 했다. 


"저와, 거래를 말입니까?"

"이렇게 트인 곳에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녀가 좌우를 둘러보았다. 갈색 머리칼이, 아까처럼 또다시 팔랑거렸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그는 눈앞의 여자를 명확하게 인지했다. 제 가슴팍 정도 오는 키. 틀어올린 갈색 머리칼. 하얗고 가는 목. 짙은 장미색 드레스. 그리고 다시 마주친, 눈.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서, 오직 그를 직시하고 있는 연녹색의 눈동자가 둥글게 휘었다. 


"옥새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작은 입술이 미소를 지었다.



-


그 순간 왜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는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그것 참, 공교롭군."


한 발자국 다가섰다. 

움찔하면서도 피하지 않는 시선이 꽤, 유쾌해서


"그래서..."


근처에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는 기척도, 상관이 없었다.


"나와 무슨 거래를 하고 싶은 거지?"




-


"아무리 공작님이라 하셔도 이번에는 도가 지나치십니다."

"나로서는 더 할 말이 없군."

"맥밀런 영애는 제 약혼녀란 말입니다!"


고요한 장미 정원에 울분에 찬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움켜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남자와 달리, 맞은편에 선 노아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프렌치 브룩스, 였던가. 브룩스 후작가의 덜된 맏아들. 후작가 사정이 어렵다 들었는데, 돈 많은 정혼자를 놓치게 생겨 화가 난 모양이군. 조금 전, 약혼녀의 뺨을 내리치려 했던 남자의 손을 내려다보며 노아는 입 끝을 비죽이 올렸다.


"이제 경은 그녀의 약혼자라 칭할 자격이 없지 않나."


모멸감에 남자가 바들바들 떨었다. 노아는 작게 웃었다. 그는 지금 매우, 기분이 좋았다. 


「이제 더 이상은 숨길 수 없게 되어버렸네요.

「……레리아나?」

「브룩스 경. 경께 사과드립니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자신을 따라나온 여자. 갈 길이 바빴던 자신. 어두운 밤. 인적 없는 장미 정원. 그녀의 입에서 나온 제 비밀. 가까이에 다가선 순간, 두 사람을 발견한 그녀의 약혼자. 그리고-


「저는 윈나이트 공작님과 마음이 통했습니다.」


가만히 내려다보자 그녀의 입술은 소리 없이 '옥, 새.'라 말해왔다. 자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작은 얼굴. 제 그늘 속에서 저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빛나는 연녹색 눈동자에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조용히 손을 뻗으면, 그 손끝에 닿는 가느다란 어깨. 기묘한 고양감을 느끼며, 그녀의 어깨를 안아 품으로 끌었다. 


"이대로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겁니다."


퍽- 애꿎은 나무 기둥만 주먹으로 친 프렌치 브룩스가 등을 돌렸다. 분을 삭히지 못한 뒷모습이 점차 멀어진다. 홀로 남은 어둑한 정원에서, 노아는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와 닿았던 자리. 어쩐지 조금 간지러운 느낌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휘튼."

"예."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인영이 나와 부복했다. '레리아나 맥밀런에 대해 조사해 봐.' 명령을 내리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들뜬 것 같기도 했다. 발걸음을 돌려 약속 장소를 향하면서, 노아는 그를 이리 유쾌하게 만든 여자의 이름을 되뇌었다.


레리아나 맥밀런. 

레리아나, 맥밀런.




-


"늦으셨습니다."

"아아, 오다가 강아지를 만나는 바람에."




-


고개를 돌릴 때마다 팔랑거리는 갈색 머리칼. 저를 빤히 올려다보던 동그란 연녹색 눈동자. 입으로는 협박의 말을 내뱉으면서도 눈에는 악의가 담겨 있지 않은 게 훤히 들여다보여서, 그게 퍽 우습고, 또 기꺼웠다. 세상 어떤 사람이 악의 없는 작은 강아지를 무서워한단 말인가. 


"아까부터 왜 자꾸 웃으시는지 이유라도 말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반 걸음 뒤에서 걸어오던 키이스가 참다 못해 말했다. 텁텁한 기름 냄새 가득한 지하 통로에, 묘하게 원망 어린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삼십분이나 늦으셨습니다. 시간을 안 맞추면 오브라이언 백작이 또-"

"키이스."


키이스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가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되돌아오는 목소리는 태평했다.


"괜찮은 꽃집을 아나?"

"……예?"


키이스도, 한걸음 뒤에서 따르던 아담도 고개를 들어 노아를 쳐다보았다. 알 수 없는 질문에 혼란스러워 하는 제 보좌관을 두고, 노아는 조금 전 만났던 강아지를 떠올렸다. 텁텁한 지하 통로에서, 어쩐지 조금 전의 꽃 내음이 나는 듯 했다. 


역시 장미가 좋으려나.


제 발칙한 하룻밤의 밀회 상대가 다른 생각을 하기 전에, 그는 선물을 들고 찾아가 물어볼 생각이었다.

당신, 무슨 짓을 할 생각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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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생각보다 이렇게 길어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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