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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BL

감상/ 해후

by 뀽' 2022. 4. 17.

해후  /  이코인

★★★☆

가랑비 같이 울게 만드는 잔잔물

 

내가 가르쳐 주기도 전에

너는 벌써 내 이름을 부르고 있더라.

마치 내가 널 사랑해도 되는 것처럼.

 

※주의: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되어 있는 글입니다.

 

신기하다. 엄청난 반전이나 자극적인 전개 없이, 첫장을 편 자리에서 마지막 장까지 넘기게 만든 잔잔물은 처음이다. 기분 좋은 보슬비 같은 문장들을 따라 걷다 보니 몸도 마음도, 그리고 베개도 흠뻑 젖어 있네요. 얘네는 이제 행복해졌는데 나는 왜 이렇게 자꾸 눈물이 나지ㅠㅜㅋㅋ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과거에 인연이 있던 두 사람이 모종의 이유로 이별을 겪었다가 다시 만나는 재회물임. 그러나 작품소개를 보면 이게 잔잔물일 거라곤 쉽사리 예상 못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요 키워드에 할리킹, 여장, 기억상실, 도망수 같은 엄청난 단어들이 있기 때문에ㅋㅋ 그렇다 이것은, 가난한 수(이하경)가 어머니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재벌집 손녀인 척 여장을 해서 연기를 하다 그집 손자(장윤성)와 눈이 맞는다는, 대한민국 아침드라마 대본으로도 손색이 없는 내용! 와! MSG! 벌써 재밌다!ㅋㅋㅋ

 

그리고 작가님은 놀랍게도 이 조미료 가득한 키워드들을 가지고 담백한 유기농 웰빙 푸드를 만들어 내셨으니. 그건 아마도 이 작품의 포커싱이 주인공수 두 사람의 7년 전 풋풋하고 싱그러웠던 기억,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의 애틋한 재회에 맞춰져 있기 때문인 듯. 서로 떠보고, 캐어묻고, 의심하던 두 사람이 짧은 유예 속에서 같이 싸구려 아이스크림을 먹고, 비를 맞으며 달리고, 나란히 앉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던 순간들, 그 순간들을 거쳐 결국 사랑을 인정하고 마는 모습이 글 속에서 영롱하게 빛난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을 만드는 데 기여한 이 작품의 특징이자 장점은 지독한 악인이 없다는 것. 선악 스케일에서 극단에 속한 인물이 없고, 대신 모든 인물이 평범하게 이기적인 동시에 평범하게 선량한 면모를 갖고 있다. 우리 아들한테서 떨어지라며 냅다 김치 싸대기를 때린다거나, 질투에 눈 멀어 거짓말 일삼는 악역 같은 게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전체 스토리 얼개가 상당히 드라마적임(계약 맺고 재벌집에 들어가 연기를 하다 사랑에 빠진다)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이 상식적이라 극적인 갈등 상황 자체가 벌어지지 않아요. 다들 교양 있는 현대인답게 대화로(가끔은 돈으로) 해결함ㅋ

 

그럼 좀 싱겁지 않나 싶을 수도 있는데, 이 작품은 아주 영리하게도 플롯을 이끌어가는 긴장감을 다른 데서 가져왔음. 그리고 그건 다름아닌 장윤성의 기억상실(두둥).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홀라당 잊은 채 업보 쌓는 그런 전개는 아니고, 오히려 기억 없는 윤성이가 하경이에게서 무언가를 느끼고선 자기 기억을 찾는 걸 도와달라며 접근을 한다!!! 그리고 현재 시점의 이 기억 찾기 스토리가 7년 전 과거와 번갈아 나오기 때문에, 독자들도 윤성이와 마찬가지로 전혀 정보값이 없는 상태에서 출발해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라는 수수께끼의 답에 천천히 접근해가는 전개라 아주 흥미진진함.

 

다만 한 가지 흐린 눈을 해야하는 것이 있다면 역시 하경이의 여장 설정. 다 큰 20대 성인 남자(심지어 키도 큼)가 여장을 했는데 큰 위화감이 없다는 기본 설정은 적당히 소설적 허용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물론 속이려는 대상이 눈이 침침한 할아버지인데다,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면 사람들이 이상해 하며 돌아볼 모양새라고 서술되니까.. 완벽한 여장이라기보단 남자치고 가녀린 체형에 목소리도 적당히 중성적인 정도라고 상상하면 큰 문제는 없음ㅠㅠㅋㅋ 가장 가까이에서 지낸 윤성이는 언제 눈치챘냐구요? 그건 읽어서 확인합시다 ^^

 

다 읽고 나서 특별히 기억 나는 사건이 없다는 후기들이 많은데, 그럴 수밖에 없는게 정말 강렬한 사건 없이 전개된 작품이기 때문에ㅋㅋ 물론 잔잔물이라고 해서 둘의 감정까지 잔잔하기만 한 것은 아님. 다정공의 화신인 장윤성 씨가 질투할 땐 그렇게 격렬할 수가 없어요 증말 베리 굳(흐뭇). 하경이도 처량하거나 소심하기보단 애가 강단이 있고 뻔뻔한 구석이 있어서 보는 내내 마음이 편했다ㅋㅋ 최근에 심신이 고단했는데 정말 최고의 힐링물이었음. 꼬이고 꼬인 감정 소모 없이 편안하게 읽히면서 잔잔하게 사람 울리는 작품을 찾는다면 추천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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