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비정규직 황후

  

비정규직 황후  /  한민트

★★★★

도피를 한 곳에서 다시 맞닥뜨린 현실이 아파도 너무 아프다

“

잊어버리지 마렴.

여자는 항상 남자보다

두 배로 냉철하고 논리적이어야 한단다.

그래야 남자가 말하는 것의 절반이라도

진지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거든.

”

 

제목과 표지와 작품소개가 삼위일체를 이루어 이것은 가벼운 남장여자 황궁로맨스물이랍니다 데헷-☆하고 있지만 그딴 거 다 거짓부렁입니다 이런 로판의 탈을 쓴 현실 르포 다큐멘터리 난 처음 봤음. 결말부로 갈수록 소름끼치게 계획적으로 잘 쓰인 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현실도피하고 힐링하려고 읽었다가 도리어 상처만 두배로 후벼파이게 만든 소설이라.. 이 훌륭한 작품에 별점 만점을 줄 수가 없다. 나는... 이런 리얼리즘을... 원한 게 아니었어.....ㅋㅋㅋㅋ

출세욕도 명예욕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늘어져서 맛있는 디저트를 먹는 게 삶의 제일의 보람인 치안대 기사, 게으름벵이 에스틴 경. 사실 그 정체는 남자 '에스틴'이 아닌 여자 '에스텔라'다. 검술로 유명한 아르투르 가문의 마지막 남은 자손이고 에스텔라 본인의 실력도 그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성별이 여성이기에 허락되지 않는 사회 진출.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하나 싶었을 때, 아버지가 '외동딸'인 자신을 세상에 있지도 않은 남자 형제 '에스틴'과 함께 쌍둥이로 호적에 올려놓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뭐다? 남장이다. 호적까지 버젓이 준비돼있고 일단 남자가 되면 적당히 기사 일하면서 먹고 살 수 있는데 안 하는게 오히려 이상한 짓.

여자인 걸 들키면 안 되기 때문에 적당히 낮은 곳에서 전전하며 게으르게 사는 에스텔라였지만, 인생이 그리 순탄치 않다. 에스텔라가 본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티소엔 경은 매번 찾아와 대련을 청하면서 경은 향상심도 없냐고 화를 내지를 않나, 기사단 출동한 곳에서 황태자가 여자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지를 않나, 그 황태자가 갑자기 자신에게 찾아와 여장하고서 아니 사실 여자인데 자신과 5년만 계약결혼하자고 하지를 않나, 두둑한 퇴직금 약속 받고 계약했더니 이번엔 황실에서 상상도 못했던 '적'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 소설은 주인공 에스텔라의, 더 나아가서는 독자들의 '적'이 과연 누구인지에 관해 끊임 없이 질문을 던진다. 소설 초중반부 무섭고 소름끼치는 '마녀'라는 존재가 끔찍한 적인 듯 규정되었다가, 도리어 마녀들을 해하려는 집단의 잔인성으로 포커스가 옮겨가고, 이 문제의식은 개개인이 아닌 기득권 집단이 만들어낸 사회 구조 자체로까지 확대된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성별'의 문제, 그 하나 때문에 이유 없이 괴물로 몰려 죽어야 하는 여성들과 함께 분노하다보면 사실 이 대대적인 마녀사냥이 있기 전부터 이미 여성들은 기득권이 만들어놓은 관습과 사회구조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에스틴 경이 출세욕도 없는 게으름벵이로 살아야 했던 이유, 그 전에 에스텔라가 에스텔라가 아닌 에스틴으로 살아야 했던 이유, 그리고 그보다 이전, 에스텔라의 아버지가 있지도 않은 '에스틴'이라는 존재를 호적에 올려놓은 이유. 소설 극초반부 그저 평범한 남장여자 로맨스물 클리셰인 줄 알았던 설정들이 후반부에 이르러 모두 이러한 전개를 위한 것이었음이 드러나며 빛이 난다.  

이렇게 무겁고 현실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장르가 로판인 이상 로맨스 부분도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작가님의 능력이 워낙 좋으셔서 메인남주(황태자 클레오르)와 서브남주(티소엔 경)을 작품 전체의 주제의식에 잘 녹여내는 동시에 적절한 로맨스도 놓치지 않으신다. 독자층이 기대하는 설렐 만한 장면들은 많이 들어가 있어요!ㅋㅋㅋ 단지, 작품의 주제를 제대로 살리는 이 두 남주간의 대조가 씁쓸하긴 함. 

머리 좋고 눈치 빠른 '평민 출신' 황태자 클레오르는 누구보다 이 사회구조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남자 중 한 명이고, 그래서 에스텔라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도울 수 있는 우군이지만 황태자인 그에게서 '정치'를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늘 클레오르에게서 느껴지는 이 '계획적인 면모' 때문에 그가 에스텔라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거기서 어떤 순수성을 찾아보기 힘들어 늘 뒷맛이 씁쓸하다. 반대로 티소엔 경은 지독할 정도로 순수하고 저돌적인, 작중묘사에 따르면 '멧돼지' 같은 순정남인데ㅋㅋ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는 그 순수한 애정에 마음이 따뜻하면서도, 클레오르만큼 이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선봉장에 서지는 못하는 사람인 것이 결국 발목을 잡는다. 

로판 독자들이 흔히 바라는, '아무 것도 계산하지 않는 순수한 사랑'에 가까운 것은 클레오르보다는 티소엔 쪽이라 티소엔 지지층이 약간 더 많아보이긴 하는데ㅋㅋ 어쨌든 다 가진 남자, 그런 거 이 작품에 없다<< 어느 쪽을 택하든 어떤 큰 부분을 포기해야 함. 물론 그렇다해도 충분히 설레는 장면들 투성이고, 현실고발 르포 다큐(...)뿐 아니라 로맨스물로서의 역할 또한 이백퍼 해내는 작품이니까 그런 걸 걱정해서 이 작품을 안 읽고 스루하는 독자는 없었으면. 그만큼 잘 쓰인, 훌륭한 소설입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