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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Romance

감상/ 이세계의 황비

by 뀽' 2018. 8. 21.

  

이세계의 황비  /  임서림

★★★

이런 비정한 고3 같으니라고


난 살고 싶어서 이러는 거예요.

살고 싶다는 건, 목숨만 부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내 뜻대로 내 인생을 선택하고 살 수 있기를 바라요.

 

현재 로판계의 주류로 자리잡은 빙의나 회귀물이 있기 전, 차원이동물이라는 조상님이 계셨으니. 제목부터 대략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은 이계로 간 고등학생이 깽판을 치는(...), 이른바 로판계의 이고깽물이라 할 수 있다. 본래 '대한민국'에 살던 사람이 '판타지 세계'에 가서 산다는 점에서 빙의물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영혼만 한국인인 빙의물과 달리 차원이동물은 한국인 모습 그대로 천애고아 상태에서 판타지 세계에 적응해야 한다는 점에서 난이도가 더 헬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바로 이 지점을 십분 잘 살리고 있음. 


대한민국의 평범한 고3 수험생이었던 비나는 수능날 아침, 시험치러 가다가 지하철 역에서 떨어져 전혀 다른 세계로 이동하게 된다. (시험 치기 전에 이동한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그나마 마음씨 좋은 공작 부부에게 거두어져서 잘 적응할 수 있겠다 싶었더니, 알고보니 적당히 교육시켜서 늙고 추레한 황제의 첩자리로 제 친딸 대신 보내려는 수작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비나. 도망칠 방법이 없어 절망하고 있는데, 황제와의 첫날밤 난데없이 암살자가 나타나고. 단번에 저 세상 가신 황제를 따라가기 전, 암살자의 정체가 다른 이도 아닌 황제의 아들 황태자임을 눈치 채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일단 설득을 해보려 하는데...


이야기는 이렇게 비나가 황태자 루크레티우스와 '정치적 동맹'을 맺으면서 시작된다. 친정 없고 인맥 없고 자본 없고 이쪽 세계에 대한 기본 지식조차 부족한 비나가 오로지 자신의 순발력과 설득력으로 위기를 매번 넘기는 전개가 그야말로 쉴 틈 없이 휘몰아치니, 이 소설을 읽고 지루하다거나 재미없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듯. 물론 초반 루크와의 정략적인 결혼을 통해 '황비' 자리에 오르지만 그래서 다행이라고 말하기에는.. 황비 자리에 올라 누리는 것들은 그냥 생명수당이랄까.. 초중반까진 루크가 완전히 비나의 편인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쪽도 경계해야 할 판 황제의 비가 되었다는 건 그저 심심하면 은수저가 검게 변색되는 살벌한 생활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다는 것에 불과하다. 


소설이 기본적으로 1인칭 서술 방식으로 쓰여있다 보니 다소 유치하게 느껴지는 문장이나 표현들이 부각되고, 주인공 비나가 어떻게 봐도 고3답지 않은 사기급의 적응력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중간보스를 담당하고 있는 인물들(에일 공작가, 리즈벳)이 지나치게 평면적이라는 것이 단점. 특히 리즈벳의 경우 아무리 악역이라 해도 그녀만의 강렬한 캐릭터성이 있다기보다는 그저 주인공의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로서 무식함, 천박함, 눈치 없음, 자기중심적인 성격 등 안 좋은 요소란 요소는 기계적으로 모두 부어넣은 듯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이 어린이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극명하고 유치한 흑백구도로 흘러가지 않는 것은 최종보스 카틀레야 캐릭터가 가진 어느 정도의 입체성,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공인 비나와 루크가 그리 선한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 덕분이다. 일단 주인공인 이상 일반인 수준의 모랄은 가지고 있지만, 이들이 속해있는 비정한 정치 세계는 그들로 하여금 일반적인 도덕관념을 위배하는 일들을 끊임 없이 저지르도록 만든다. 거짓말이나 증거 조작 정도는 우습다. 자신이 죽지 않으려면 무슨 짓을 해서든 상대를 반드시 낭떠러지까지 몰아 기어이 단두대에 세워야 한다. 어설픈 화해나 타협은 없다


개인적으로 꼽는 이 작품의 명장면은 바로 비나가, 어느새 큰 죄책감 없이 비정한 일들을 저지르고 있는 스스로를 자각한 장면. '흔적 밖에 없는 죄책감을 발굴해 내는 기분이에요. 다 먹고 남은 짐승 뼈를 짜 맞춰서 원래 모양을 만드는 기분이랄까.'라던 비나의 씁쓸한 자조가 꽤 오래 마음에 남는다. 외모는 여전히 한국인이고, 그래서인지 비나는 그 어떤 빙의물의 주인공들보다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작품 내내 강렬하게 바라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점점 평범한 고등학생일 때의 도덕관념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기분이 어떨지.. 


이렇게 사건 위주의 빠른 템포로 진행되는 작품이지만 그렇다고 로맨스 부분이 약한 건 아니다. 중간 중간 루크의 관점으로 전환이 되어 감정 서술이 이루어지고, 이러한 묘사들은 루크와 비나가 정치 동맹에서 연인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해나가는 서사에 힘을 실어준다. 그리고 일단 루크가 로판남주로써 평균은 합니다<<ㅋㅋㅋㅋ 비나가 그 어떤 로판여주보다 강렬하게 본국귀환(...)을 원하는 여주다보니 그쪽 관련 떡밥도 차곡차곡 잘 쌓이다 잘 풀어냈고. 비나가 마지막 결정을 내린 이유도 지극히 현실적이라 좋았음


(카카오페이지 기준으로) 2015년에 연재를 시작한, 벌써 3년이나 된 작품이라 요즘 트렌드라 할 수 있는 빙의, 회귀, 조신남주 등과는 잘 맞지 않지만 이 정도로 사건이 끊임 없이,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흥미진진한 전개의 로판은 많지 않다. 질질 끄는 부분 없이 빠르게 전개되는 로판을 찾는 사람에게 딱 맞는, 속시원한 차원이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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