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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Romance

감상/ 경성탐정사무소

by 뀽' 2018. 8. 13.

경성탐정사무소  /  박하민

★★★★☆

이토록 따뜻한 추리물

 

아직 오지 않은 봄이 그 공간에 잠시 머물렀다.

 

보통 추리물하면 번뜩이고 냉정한 추리로 범인을 잡아내는 쾌감부터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그와는 조금 궤를 달리한다. 일단 분류가 로맨스물로 되어있.. 작중 '만세 운동'이 얼마 되지 않은 일이라 하는 걸 보면 아마도 1920년대 즈음으로 추정, 그 암울한 시대를 탐정과 조수 두 사람의 시선으로 담아내면서 '추리'를 메인으로 '로맨스' 양념을 뿌린 '시대물'이라는, 한 박자 맞추기도 어려운데 삼박자를 모두 제대로 갖춘 수작이 탄생했다(두둥

 

경성에서 탐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사설 미남 탐정, 정해경. 그의 도움을 받아 누명을 벗고, 그의 탐정사무소에 조수로 취직하게 된 열여섯살 소녀, 박소화. 이 두 주인공 외에도 향운정의 주인이자 대부업까지 겸하고 있는 최인혜(인맥+정보담당), 흥친왕의 삼남이자 경성제대 의학부에 재학중인 이환(의학지식+왕족인 걸 이용한 나름의 권력 담당)이라는 조력자까지. 그 혼란스런 시대 속에서 매력 넘치는 인물들이 갖가지 미스테리한 사건으로 엮이는 데에다가 그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흥미진진한 과정 속에서 언뜻언뜻 설레는 감정들까지 비치니 이건 재미없기가 더 힘들다. 중후반부 들어서면서부터는 해경의 과거와 친일파, 독립 운동 등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얽히면서 시대물다운 비장미까지 느낄 수 있음.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 아프면서도 마음에 남는 에피소드는, 조선인들의 연쇄 실종사건을 다루고 있는 2권 '악몽의 밤'. 해경과 소화의 관계성에 있어 큰 전환점이 되는 에피소드임과 동시에, 해경의 과거사가 이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데다, 이 사건 자체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대했는지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에피소드이기도 해서.. 가장 많이 분노하고, 가장 많이 탄식하고, 그래서 가장 많이 마음에 남는, 그런 사건.

 

어, 음, 그런데 일단 이 작품 분류는 로맨스잖아요? 그래서 탐정과 조수가 연애하는 그런 이야기 기대하고 들어온 독자층이 꽤 있는 거 같은뎈ㅋㅋ 그런 것'만' 기대하고 들어왔다면, 아니 왜 얘네 연애는 안 하고 추리만 해요8ㅁ8???할 수도 있다. 거두절미하고 얘기하자면, 당신이 기대한 로맨스가 손잡고 입맞추고 뭐 그런 거라면 그런 건 본편에 나오지 않습니다<<ㅋㅋㅋ 아니, 손 잡는 건 나오긴 하지만 어쨌든 이건 그런 부류의 로맨스물이 아님. 

 

두 사람 사이의 진도가 영 나가지 않는 것에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얘네, 은근히 할 거 다 합니다(?). 기본적으로 젠틀한 신사지만 제 관심사 외의 것에는 무감하고 냉정하고 찬바람 쌩쌩 날리시는 정해경 탐정님께서 소화와 관련된 것이라면 진짜 파르르 떠는 파워예민보스 되심ㅋㅋ 다른 남자가 소화에게 관심을 보이거나 악수만 청해도 불한당 취급하지를 않나, 소화가 다른 남자를 빤히 쳐다보면 저 남자에게 반한 걸까 속으로 전전긍긍하는데 정말..ㅋㅋ 그래도 소소하나마 둘이 같이 활동사진(영화)도 보고, 양식 레스토랑도 가고, 다정한 오누이로 위장하면서 포옹도 합니다, 단지 정해경 씨가 너무 코난 돋아서 가는 곳마다 사건 터지는게 문제지..(여기가 그 유명한 탐정사무소입니까?

 

로맨스 측면에서 좋았던 건,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의외로 일방적이지 않았다는 것. 저 시대에 남자와 여자의 지위 차이가 상당했던 데에다가 탐정과 조수라는 직업적 상하 관계, 거기다 7살이나 나는 나이 차이까지. 당연히 소화가 해경에게 거의 대부분 '의존하는' 관계일 거라 생각했는데. 초반부 해경이 소화를 구해주고 사무소에 취직시켜줄 때까진 소화가 해경을 의지하는게 부각되었다면, 중반부 들어서면서부터는 과거 때문에 흔들리는 해경이 멘탈을 소화가 잡아주는 걸 넘어서서 아예 사건 해결 자체에 소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

 

애초에 해경에게 의지해야했던 극초반부에서부터 소화의 능력에 대한 떡밥이 많이 깔리는데, 소화는 그녀가 가진 비상한 머리와 자주적인 성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키워준 좋은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글도 못 읽는 사람이 많았던 당시에 한문과 한글 모두를 읽는 그야말로 고스펙자...ㅋㅋㅋ 경성에 와서 하녀 일을 하며 억눌려있던 그녀의 능력이, 이를 알아본 해경을 만나 그야말로 눈부시게 피어난다는 느낌이다. 벤츠중에서도 상벤츠인 해경이가 '그녀의 앞길을 내가 막아서선 안 된다'고 매번 다짐하면서도 소화가 자길 훌쩍 떠나버릴까봐 덜덜 떠는게 너무 이해가 잘 감ㅠㅠㅋㅋㅋ

 

그런 두 사람을 놀리고 응원하는 주변인들의 따뜻한 시선도 좋았고, 그런 따뜻함이 너무나 가혹하고 차가운 시대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었어서 더 좋았다. 식민지 조선 속 각자의 위치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의 무능함, 무력함, 그리고 때론 위선마저도 느끼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를 위해 주저 없이 희생하는 이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애틋하

 

역사가 스포라 앞으로 닥칠 일들을 생각하면 그들이 맞이한 이 소박하고 따뜻한 해피엔딩을 보면서도 걱정부터 앞서지만, 정의롭고 강인한 그들이 부디 그 긴긴 겨울을 함께 잘 견뎌냈을 거라 믿는 수밖에. 소화의 바람대로, 이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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