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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Romance

책갈피/ 후원에 핀 제비꽃 - 체자레

by 뀽' 2018. 8. 21.

※ <후원에 핀 제비꽃>의 중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 페이지 수는 e-book 개인 설정 기준



붉은 달은 꿈을 꾸네

최후의 하늘을


― Kalafina의 Red Moon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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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부터는 꽃을 이렇게 많이 피우면 아니 되십니다."


그 말에 고개를 들어 뒤를 바라보았다. 한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중략) 비올렛의 앞에 선 남자는 키가 컸으며,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누구세요?"

"글쎄, 지나가던 신관 나부랭이입니다만."


비올렛은 고개를 갸웃했는데, 이 남자의 차림새가 도저히 신관으로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기껏해야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성은 루비색 머리를 세련되게 하나로 묶어 내렸으며, 군청색에 금색의 장식이 달려 있는, 몸에 딱 맞는 갈색의 호피가 달린 화려한 털옷을 두르고 있었다. 농담으로라도 '지나가는 신관 나부랭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차림새였다.  (1권,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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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발휘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식물을 되살리지는 마십시오. 모든 것에는 법칙이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을 아십니까? 식물들은 겨울이 되면 잠을 자고 봄이 되면 다시 깨어나 소생하는 것, 그것은 자연의 법칙 중 하나입니다. 성녀님은 잠든 식물들을 깨웠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잠들어야 합니다. 또다시 죽음을 맞이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과정인지 모르시겠지요. (1권,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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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워하며 울부짖는 여인이 시끄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은 여자의 폐에 검을 찔러넣었다. 아나스타샤는 너무 괴로워 자신을 지킬 성력도 쓰지 못하고 피만 토했다. 


― 제발……! 그녀를 죽인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닙니다! 폐하를 제발 보게 해……!


아나스타샤가 비명을 질렀다. 진득한 피 냄새가 더러운 폐가를 가득 채웠고, 체자레는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이 몇 번이고 살해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너무나 무력하여 움직일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연인은 그렇게 죽고 또 죽어갔다. (5권,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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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짓 한 번에 정원에 있는 모든 꽃과 나무들이 다시 시들어 버렸다…. 그것은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느낌이었으며, 결코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할 수 없었다. 색을 잃은 꽃잎들이 우수수 바닥에 쏟아졌다. 앙상한 나뭇가지와 어느새 흐려진 잿빛 하늘을 뒤로한 채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색이 없는 모든 것들 중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선명한 붉음이었다.  (1권,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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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불을 커다랗게 피워도 하늘에는 아무 것도 닿지 않는단다. 그래도 사람들이 올린 불꽃이 하늘에 닿는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그렇다면 하늘도 불꽃의 색으로 붉게 물들어 활활 타오를까? 노을지듯 말이야.  닿게 되면, 저 하늘의 신께서도 뜨겁다고 하실 거야. (5권, 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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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신관이 뭐라고 했니?"

"제가 식물들을 자라나게 한다면 봄에 깨어나야 할 식물들이 더 일찍 깨어나서 겨울을 견뎌야만 한대요. 그러면 식물들이 더 고통스러울 거라고."


그 말을 들은 여인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참 다정한 사람이구나." (1권,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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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자레는 정말로 상당한 미남이었다. 완벽한 콧날과, 적당한 크기의 선홍색 입술, 눈꼬리는 처진 편이었고 왼쪽 눈 아래에는 눈물점이 있었다. (1권, 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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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 아니니?"


아나스타샤의 반문에 체자레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물론 그도 자신의 외모가 잘생겼으며, 아름다운 축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살아가는데 하등 쓸모가 없는 것이 외모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지금 아나스타샤가 그에게 아름답다고 칭찬을 했다. 그리고 그게 좋아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가?


"어, 음……."

"난 아름다운 게 좋아, 체자레."


아나스타샤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5권, 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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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올해 마흔 여덟입니다."

"네에?"


그녀의 눈이 커지자 그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보기 좋은 웃음이 흩뿌려졌다.


"말도 안 돼요. 그러면 할아버지잖아요!"

"어허, 서운하게 그런 말씀을 하시다뇨."  (1권, 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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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전하, 아니 당신에게 하대라도 하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스승님이 제게 존칭을 쓰실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저 역시 편하게 대해주시는 편이 좋고요. 어차피 어린아이나 저나 스승님께는 똑같은 아이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체자레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아나스타샤는 화를 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체자레, 당신이 저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데요."

"그렇습니까? 어딜 봐서도 스승님께서 나이가 더……. 그리고 실제 연세는 약 백아흔 살이지 않습니까?"


그 말에 그녀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체자레는 그제야 아나스타샤가 불쾌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화를 내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진짜로 화를 내고 있다는 것도.  (5권, 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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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께서는 제가 오래 살기를 바라시더군요.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바랐더니, 정말 이대로 멈추어 버렸답니다. 신의 은총이죠. 신은 제게 무언가를 시키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1권, 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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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죽을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완전한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니었기에.  (5권, 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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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저는 신관님, 아니 공작님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그 말에 체자레가 또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 역시 아까의 비올렛처럼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래요, 스승님, 스승님은 어떻습니까?"


그는 아주 즐거운 표정이었다.  (1권, 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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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 성녀님을 뭐라 불러야 합니까?"

"저를요?"

"네. 성녀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체자레가 웃으며 말했다. 그 추격전에서의 사고도 아나스타샤가 성녀라고 그만 부르라 소리치다 일어난 일이었다. 체자레도 감히 안나라고 부를 만큼 뻔뻔하지는 않았다. 


"그, 글쎄, 굳이 말하자면 스승님이라는 말이 낫겠군요."

"스승님이요?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스승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스승님."


스승이라고 불러 달라한 것은 아나스타샤임에도 그녀의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은둔한 현자 같은 고요함을 가진 여자일거라 생각했던 아나스타샤는 의외로 귀여웠다.  (5권, 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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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성녀님을 괴물이라 했습니까? 다시는 자신을 괴물로 칭하지 마세요, 비올렛. 아셨습니까?"


이상하게도 체자레는 그 자신이 괴물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비올렛이 스스로를 괴물이라 칭하는 것에 더 슬퍼하는 것 같았다.  (1권, 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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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새끼처럼 어디서 숨어서 뭐하나 했더니, 이런 곳에서 그 한심한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던 거냐. 저 '괴물'과."

"괴물이라니……!"

"교황이 직접 왕궁으로 납시었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더구나. 참 재미있는 신화지, 아바마마가 그렇게까지 갖지 못해 미쳐 날뛰었던 년이 결국 괴물이었다니 말이다! '성녀가 있기에 말룸이 존재한다. 성녀를 죽여라.'라니!"


아스토르가는 키득키득 웃으며 체자레의 머리를 발로 짓밟았다. 대체 성하가 왜 그 이야기를 국왕에게… 아직도 체자레의 머리는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다.


"괴물이 아닙니다. 저주에 걸려서…… 그저 신만 저주하지 않으면……."

"시끄럽다! 괴물이 스스로 하는 말을 믿는 것이냐! 어리석은 놈. 교황도 나와 똑같이 생각했던 게지." (5권, 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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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자레의 애원에도 남자들은 그저 웃음을 지으며 그를 걷어찼다. 아나스타샤가 또 칼에 찔렸다. 이번에도 심장을 정확히 찔려 바르르 떨 뿐, 버둥거림조차 없었다. 그러나 여자의 저주스러운 육체는 진실로 죽음을 바람에도 생명력을 가지고 움직여 사람들은 그녀를 괴물이라 생각했다. …칼로 찔러도 죽지 않는 그 바퀴벌레와 같은 여자를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였다.  (5권,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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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은 인형도 좋아하시나요?"

"좋아합니다. 사람의 지극한 아름다움만을 뽑아내어 가둬 둔 물체가 아름답지 않을 리가 있습니까. 저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합니다."


참으로 체자레다운 말이었다. 에셀먼드는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 인형의 집 안에는 붉은 머리의 남자 인형과 검은 머리의 여자 인형이 서 있었다. 부부일까? 행복해 보이는 인형의 모습에 비올렛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1권, 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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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삶은 언제나 특유의 아름다움이 존재했다. 자신 역시도 그녀의 삶의 아름다움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생각하자 체자레는 외모에 나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샤는 가끔 그의 긴 붉은 머리카락이 예쁘다고 해 줬기에 체자레는 머리를 계속 기르기로 결심했다. 그는 달콤한 행복에 취해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향했던 곳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좋아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너무나 행복했다. (5권, 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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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구경하면 재미가 없어집니다, 비올렛. 그래도 보시겠습니까?"


…동굴 같은 감옥에 수감자들이 같혀 있었다. (중략) 수감된 자들은 모두 비올렛에게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들이다. 어떻게 체자레가 비올렛이 당한 짓을 알고 그들을 잡아왔는지는 모른다. 체자레는 정말로 불과 몇 시간 전에 자신의 성을 안내해줬던 것처럼 그것들을 보여주었다. 마치 그들 하나하나가 그의 인형이라도 된 듯이. 고약한 악취와 신음소리. 사람이었던 자들이 모두 머리를 깎인 채 나신으로 개처럼 묶여있는 모습은 비올렛에게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1권, 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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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됩니다! 대체, 어떻게 나라가, 바로 이 나라가, 나라를 지키는 성녀에게 그럴 수 있답니까!" 


체자레를 감싸고 있던 세상이 붕괴되었다. 성녀들의 수호와 신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따스한 나라는 사라지고, 서른 두 명의 여자들의 시체로 쌓아올린 비겁한 평화를 이룩한 위태로운 나라가 보였다.  (5권, 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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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를 입으로 모욕한 자, 성녀의 안전을 위협한 자, 성녀에게 위해를 끼친 자, 이들의 형벌은 모두 교황 성하가 담당하십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간단하게 말씀하셨죠. 저들에게 내보일 신의 자비는 없다고. 그런 겁니다, 비올렛."


체자레는 비올렛의 겁에 질린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하녀의 머리를 쥐었다. …나지막한 저주를 내뱉은 그가 그녀의 머리를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러자 펑 소리와 함께 그녀의 머리가 터졌다. 그 분비물에 섞인 악취와 비린내에 비올렛은 비명을 질렀다. 


"너무나 끔찍한 장면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비올렛. 하지만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성하의 사랑은, 당신에 대한 저의 애정은 이렇게나 크답니다.(1권, 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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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자레는 멍하게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느끼는 지극한 슬픔과는 다른, 사람들의 들뜬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들은 알고 있는 걸까? 이 사람들은 아나스타샤가 죽은 것을 알고 있는 걸까? 모르고 있다. 모르고 있기에 저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5권, 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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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습니까? 두렵습니까? 당신도 그들처럼 될까봐 두렵겠지요? 성녀님께선 나를 비난하고 계시겠지요. 나의 도덕적 결함에 대해, 내 잔혹성에 대해 비난하고 있을 겁니다. 가엾으신 분, 그러나 너무나 순수하신 분. 당신이 속한 이곳을 너무 믿고 계시기에 진실을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정말로 그만할까요? 하지만 비올렛, 당신은 또 얼마나 높은 기만의 탑 위에서 외롭게 살 생각이십니까?


유감입니다, 비올렛. 그러나 당신이 얼마나 많은 거짓에 둘러싸여있는지는 최소한 알려야만 했습니다. 내가 나의 잔혹함을 드러내었듯, 후작도 후작의 잔혹함이 드러나야죠. 그래야 공평한 게임이 아니겠습니까?  (1권,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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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빌어먹도록 아름다운 세상은, 너무나 추악했다.


체자레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렇게 존재만으로도 누군가의 희생을 발판 삼아야 한다면, 그것이 생존 욕구라고 정당화되는 세상이라면, 사라지는 것이 옳지 않을까? 저렇게 살고자 발버둥치는 징그러운 생명체들은 진작 멸망했어야 하지 않을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나스타샤? 체자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5권, 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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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관했다고요? 그래요. 방관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그것을 방치한다면 그것은 방관이겠지요. 아니, 당신을 괴롭게 만들었으니 방관이 아니라 가해라는 말이 옳겠군요. 하지만 비올렛, 저는 단 한 번도 그 희생을 당연하게 여긴 적이 없습니다. 누군가의 인생을 희생해서 얻는 평화를 어떻게 '신의 사랑'이라고 누리겠습니까.


아시겠습니까, 비올렛?! 나는 누군가가 그렇게 사랑하던 신에게 버림받아 비참하게 목숨을 잃어서 얻은 평화를 사랑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단 말입니다! 당신은, 오로지 당신만은 날 그렇게 여겨서는 안 돼요, 비올렛! (5권,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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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에 휩싸인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새하얀 성복은 이미 피로 붉게 물든 지 오래였다. 그는 그것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두운 하늘 아래 불기둥과 더불어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금안이 불꽃을 머금은 황홀한 빛을 띠었다. 그는 이 순간,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버림받은 자들이여, 희생을 모르고 숨 쉬며 살아가는 죄 깊은 자들이여, 피로 붉게 물들라, 붉게 타올라라, 붉게 울부짖으라!  (5권, 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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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제꽃 1권부터 다시 읽는데 체자레 서사를 다 알고 읽으려니까 너무 눈물나고 마음이 괴로워서 진도가 잘 안 나감. 체자레의 마지막 순간 린도가 울부짖었던 비명 소리가 귀에 멍멍하게 계속 울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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