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ovel/Romance

감상/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

by 뀽' 2018. 8. 24.

  

악녀는 모래시계를 되돌린다  /  산소비

★★★

그래 복수 잘 했으면 됐지 뭐


가녀린 소녀의 목이 떨어진 것에

모두가 기쁨의 목소리를 높였다.

 

선악에 관한 진중한 고찰도, 희열이 느껴지는 복수의 대서사시도, 치밀하고 개연성 있는 두뇌싸움도 기대해선 안 된다. 대신 혼자 예쁘고, 혼자 머리 좋고, 심지어 시간을 되돌리는 모래시계까지 손에 넣은 먼치킨 ‘악녀’ 여주인공이, 전생에서 자신을 괴롭힌 ‘진짜 악녀’에게 자신이 당한 그대로 철저하게 되갚아주는, 순도 100프로 사이다물을 원한다면 이 작품이 바로 그 작품.


매춘부였던 어머니가 백작과 결혼해 한순간에 백작가 양녀로 벼락출세하게 된 아리아. 그러나 백작의 친딸인 미엘르의 계략으로 인해 사치를 일삼는 악녀가 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비참하게 처형을 당한다. 그 뒤론 회귀물의 클리셰대로 아리아가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채 과거에서 깨어나, 시간을 되돌리는 모래시계를 이용해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이들에게 복수하는 스토리. 간략한 작품 소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백작의 착하고 선량한 친딸 vs 계모의 사치스럽고 악랄한 딸 구도가 부각되는 이 작품은 신데렐라 동화를 비틀어 해석한 로판 중 하나이다. 그래서 초반부엔 <깨진 유리 구두의 조각>의 라이트한 버전 같이 느껴지기도.


장점부터 말하자면 극초반부의 전개가 매우 강렬하고 좋다. 주인공 아리아가 혀가 잘린 채 단두대에 올라 처형당하기 직전, 그동안 순진하고 착한 줄만 알았던 미엘르가 다가와 ‘멍청한 년’이라고 속삭이는 장면은 소름이 끼쳐서 몸이 부르르 떨립니다ㅋㅋ 세상 모두를 속이고 아리아까지도 속인 미엘르의 카리스마가 대단한 동시에, 마지막 순간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걸 깨닫지만 혀가 잘려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피눈물을 흘리며 소리 없는 비명만 지르는 아리아의 모습은 이제 이것으로 장중한 복수의 서막이 올랐음을 느끼게 함.


주인공, 악역, 조력자 등 분량 많은 주조연 포지션에 주로 여캐가 포진해 있는 것도 매우 좋았다. 개별 캐릭터의 매력 여부와는 상관 없이 일단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요인물들이 거의 다 여캐라는 건 상당히 의미가 있음. 대신 남캐들의 경우 중반부 이후 메인남주가 부각되기 전까지는 거의 존재감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와봤자 우유부단하거나 심한 착각쟁이라 여자들에게 속고, 휘둘리고, 앞길에 방해만 되는 경우가 다수ㅋㅋ 


하지만 이러한 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높은 점수를 매기지 못하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단지 주인공인 ‘아리아’ 단 한 명을 띄우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특히나 악역들은 아리아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한 치 앞을 못 내다본다. 1화에서 그리도 위압감을 뽐내던 악녀 미엘르는 어디가고, 그저 수준 낮은 계략을 꾸몄다가 역으로 당하기만 바쁜 멍청한 미엘르만이 남았다. 미엘르에 버금가는 포지션의 악녀 이시스도 마찬가지로 수가 너무 낮아서 훤히 들여다보인다. 똑똑한 것은 오직 아리아, 그리고 중반부 이후 갑자기 캐릭터가 바뀌어 공사구분 없이 사랑에 목숨 거는 남주인공 뿐이다. 


독자 모두를 나름 긴장하게 만들었던 ‘모래시계의 부작용’도 실체를 알고 보니 김이 빠졌고, 알고 보니 주인공은 천한 핏줄이 아니라 귀한 가문 여식이었다는 출생의 비밀은 다소 불쾌했으며, 반전의 드라마였어야 할 반역 에피소드는 이미 반전의 열쇠를 다 알려주고 시작하는 허술한 전개였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읽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 것은 마지막의 마지막, 미엘르에게 복수를 하는 과정과 결과만큼은 정말 치밀하고 속시원하기 때문. 다른 피래미들을 소탕하면서 대충 같이 복수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이렇게까지 하는구나’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짓밟는다. 잠깐동안 희망을 주었다가 끝도 없는 낭떠러지로 밀어넘어뜨리는, 자신이 당했던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돌려주는 복수는 독자로 하여금 상상 이상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악역이 긴장감을 전혀 주지 못하기 때문에 다소 김이 빠지긴 하지만, 그래도 ‘복수’라는 키워드에만큼은 충실하다. 이 소설의 가치는 마지막 권에 있음. 걸리적거리는 거 하나 없이 복수의 탄탄대로 위에서 내리 달려가는 주인공을 보고 싶다면 읽어볼 만 하다.



'Novel > Romance'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상/ 메리지 B  (0) 2018.09.08
[그공사] 시아트리히 체이머스에 대한 단상  (0) 2018.08.25
감상/ 비정규직 황후  (0) 2018.08.24
감상/ 이세계의 황비  (0) 2018.08.21
책갈피/ 후원에 핀 제비꽃 - 체자레  (0) 2018.08.21
감상/ 후원에 핀 제비꽃  (0) 2018.08.15
감상/ 경성탐정사무소  (0) 2018.08.1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