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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Romance

감상/ 황제궁 옆 마로니에 농장

by 뀽' 2018. 9. 8.

 

황제궁 옆 마로니에 농장  /  정연

★★★

본격 농사 먹방 힐링 일일드라마


우리가 그곳에서 음식을 대접받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오.

우리가 정말로 대접받은 것은…

행복한 시간이었소.

 

'태양의 손'을 가진, 사실상 농사의 신(+요리는 덤)이 지상에 강림했다고 봐도 무방한 우리의 주인공, 헤이즐 메이필드. 잘생긴 남자보단 잘생긴 감자가 좋은 이 천부적 재능의 농부는 자신만의 소박한 농장을 꾸리는 게 일생일대의 꿈인데.. 어느날 할아버지가 농장하라고 옛다 준 작은 땅에 신나했더니, 알고 보니 그 땅은 황궁 신축부지로 당첨☆경축 재개발 지역☆ 땅인 것에 1차 충격, 바로 옆집 산다던 신분 높은 분이 황제라는데 2차 충격, 할아버지가 그 땅을 헤이즐에게 준 이유가 다름아닌 알박기(!)로 일확천금을 노리기 때문이라는 데에서 3차 충격ㅋㅋ 로판 주인공이 알박기라니..! 알박기라니!


그러나 남들이 뭐라하던 우리의 씩씩한 헤이즐은 황궁 바로 옆, 아무 것도 없던 그 폐허를 기어이 자신의 작지만 알찬 농장으로 일구어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모든 이들을 그녀가 손수 재배한 농작물로 만든 음식을 통해 감화시키는, 본격 먹방 힐링물ㅋㅋㅋ 궁내부 대신부터 성기사단장, 고위 귀족들까지 차근차근 '친농파'로 만들어나가는 전개가 가볍지만 매우 유쾌하다. 단,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각종 요리 묘사가 쓸데없이 대단해서 읽다보면 배고파지는 부작용이 있음. 이 소설 밤에 읽지 맙시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이백프로 진심임.


주변인들이 하나둘 친농파로 변절(...)하는 와중에 마지막까지 의심의 끈을 놓치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황제. 왜 그렇겠습니까, 남주이니까 그렇지요. 마지막까지 헤이즐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틀림없이 땅값 높이려는 수작이라 생각하는 황제 이스칸다는 변장까지 해가며 그녀의 농장에 잠입하는데..! 변장하고 만나면 사랑이 싹트는 것은 당연한 공식. 이제는 있지도 않은 '황실 기사'인 척하며 자신은 발렌타인 경이라고 얼떨결에 헤이즐을 속이게 된 황제는 점차 헤이즐의 진심을 알게 되고, 곤경에 처할 때마다 도와주게 되고, 닭장을 고치고, 장작을 패고, 그렇게 넘버원 친농파가 되고....<<


그렇다고 이게 단순히 맛있는 걸로 사람 꼬시는 스토리냐 하면 아닙니다. 가볍게 슥슥 읽히는 이 먹방 힐링 에피소드들은 요리를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어때야 하는지에서부터 시작해, 인간관계에서 다른 사람을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꿈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등 삶의 가치관 설정 문제까지 나아감. 이 과정에서 헤이즐의 반대편에 서 있던 일명 '악역 포지션'들도 대부분 그 에피소드 한정 악역일 뿐이다. 오오 친농파의 이름 아래 대동단결 위아더월드하는 아름다운 세상. 


그러나 기승전결이 뚜렷하거나 등장인물 간의 깊은 서사가 켜켜이 쌓이는, 그런 소설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가능성이 높다. 이 작품은 그런 류의 작품이 아님. 밤 10시 프라임타임 톱스타들이 나오는 드라마가 아니라, 매일밤 저녁 8시 편하게 보는 일일드라마 같은 소설이랄까. 본편만 해도 240화나 되는 긴 호흡이고, 각 에피소드도 [농장을 반대하는 세력이 흉계를 꾸밈 → 헤이즐의 위기 → 재기와 진정성을 통한 극복 → 우리는 모두 친농파 해피엔딩]의 구조가 비슷하게 반복이 되어서 취향에 따라 다소 늘어진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슴 깊숙한 곳이 찌르르 울리기보단, 아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야겠다고 가벼운 다짐을 하게 만드는, 그 정도의 깊이.


그래도 이게 단순히 비슷한 에피소드만 반복되는 전개가 아니라 황제 이스칸다를 위협하는 세력과의 싸움이라든가, 이스칸다와 헤이즐의 로맨스라든가, 기승전결 확실한 스토리 또한 착실하게 전개되고, 이에 관한 떡밥들도 충실히 회수되는 편이니 긴 호흡을 가지고 한번에 읽는다면 매우 재미있을 듯. 


무엇보다, 굉장히 귀엽고 따뜻하고 배고프게 만드는 것만 제외하면 기분 좋은 소설이다. 미친듯이 화나거나 설레거나 슬프거나 그런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지만, 헤이즐이 대접하는 요리들을 하나둘 따라가다보면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농장에서 장작을 패고 있던 황제처럼 친농파가 되어 있는 자기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록 내 취향이 좀 농도 짙은 감정으로 스피디하게 전개되는 류라 개인평점이 높지는 않지만, 추천할만한 작품임은 틀림 없다. 감상문 쓰다보니 또 감자 먹고 싶어짐. 헤이즐이 키운 감자 한 번 먹어봤으면 8ㅁ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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