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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Romance

감상/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 법

by 뀽' 2019. 4. 10.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 법  /  성혜림

★★★★

결국 새는 알을 깨고 나왔다


어두운 밤과 같던 자신들의 인생에

길잡이별이 생긴 것 같았다.

 

제목만 보고 오 이거 레이디에 빙의해서 로맨스 알콩달콩하는 이야기인 건가요 하는 분들은 일단 작가님 전작부터 보고 옵시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진짜 큰 상처 입을 수도 있음ㅋㅋㅋㅋ 그도 그럴 것이 이건 '우화'다. 화나다 못해 지치는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어 풍자하고 있는 이 작품은, '에스텔'이라는 별의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지난 날의 과오를 깨닫고, 후회하며, 기득권에 맞서 싸우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나가는 일종의 성장물에 가까움. 물론 그렇다고 로맨스가 부족하다는 건 아닙니다. 달달했다가 진창에 처박혔다가 아주 냉탕 온탕 번갈아 담그는 바람에 멘탈이 박살나서 그렇지..ㅋㅋ...ㅋ... 


얼샤 왕국 최초의 여성 기사이자 기사단장 자리에까지 오른 영웅. '샛별'이라는 별칭을 가진 '에스텔 슈페르트'는 가장 믿었던 친우이자 부관의 손에 죽고, 눈 떠보니 제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허약한 레이디의 몸이 되어 있다. 그것도 그냥 레이디가 아니고, 적국의 백작가 레이디. 뒷통수 얼얼하게 죽은 것도 억울한데 정신차려보니 3년이란 시간이 지나 있고, 지키려 했던 왕국은 망해있고, 제 뒷통수 때린 그놈은 공작이 되어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전장에서 칼을 맞대고 싸웠던 이 제국의 기사단장이 자신의 약혼자란다(대환장 


그러나 이 대환장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깨닫는 것이 있으니, 이 작품 최고의 뒷통수치기 장인은 절친 코스프레하다 배신 때린 칼리드가 아니라 작가님이라는 것이다. 에스텔보다 독자들의 뒷통수가 평평할 거 같다. 여기저기 떡밥 조각 심어놓았다가 중후반부부터 폭발적으로 터뜨리는 작가님의 서술방식이 이 작품에서도 역시 빛남. 


에스텔이 여성임에도 기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 국왕을 '할아범'이라고 친근하게 불렀던 에스텔. 늘 사지로 내몰리듯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던 그녀의 기사단. 영지민들이 귀족에게 반감을 가지고 공격하는 것이 당연했던 얼샤 왕국. '넌 아무 것도 묻지 않았고, 어떤 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며 화를 내는 칼리드. 그렇게 켜켜이 쌓여가던 불안감은, 결국 예정되어 있던 잔인한 진실까지 에스텔과 독자를 기어코 끌고 간다. 


하지만 그 잔혹한 진실이 이 소설이 품고 있던 가장 중요한 반전이자 주제가 아니라는 게 이 작품의 킬링 포인트. 지난 과오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된다. 자신의 눈을 가리고 시야를 좁히던, 캄캄하고 작은 알과 같은 세계를 깨부수고 나온 상처투성이 에스텔은 이제 무엇이 잘못되었던 건지 안다. 권력이라는 것, 그 권력과 기득권이 만들어놓은 관습, 관습에 따라 작위조차 물려받을 수 없는 여성, 그렇기에 레이디들이 택했던 생존 방식, 그리고 이를 비웃었던 과거의 자신. 여성 '기사'이기에 오히려 남성들의 시각으로 레이디를 바라보았던 에스텔이 바로 그 '레이디'가 되어, '그녀들'을 이해하는 동시에 '그녀들'을 옭아매었던 관습을 부수는 순간, 에스텔은 진정한 의미의 샛별이자 '길잡이별'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장대한 성장 서사는 주인공의 약혼자인 제드, 그리고 배신자 칼리드라는 두 남자 캐릭터의 서로 다른 사랑 방식과 맞물려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설레고 애틋하고 심지어 달달하게(!) 진행됨니다ㅋㅋ 한놈은 과거만 설레고 현재는 소름끼친다는 게 문제지만.. 자신이 만든 작고 캄캄한 거짓 세계에 에스텔을 가두고 그곳에서 그녀가 행복하게 빛나길 바랐던 칼리드와, 매번 부딪치고 오해하고 싸우지만 그 모든 순간에 진심이 담겨있었기에 결국 에스텔의 진심 또한 받을 수 있었던 제드가 상당히 대조됨.


칼리드의 경우 아니 이런 미친 기만자 새ㄲ1를 봤나, 로 시작해서 전개 내내 '사정이 있는 게 분명하다!!!'는 자아1과 '아니 근데 사정이 있어도 이건 너무하지 않냐?'라는 자아2의 내적 싸움이 엄청난데욬ㅋㅋㅋ 결국 모든 진실과 칼리드의 뒷사정을 안 다음에도 이 내적자아싸움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머리는 자아2인데 가슴은 자아1임. 칼리드가 왜 그런 짓을 벌인 건지, 머리로는 그러면 안 된다고 점잖게 말하는데 가슴으론 이백번도 넘게 이해가 간다며 절규하고 있다 젠장할 어쩌란 말이냐 트위스트 추면서<< 


여하튼 제드와 칼리드 모두 에스텔의 성장 서사에 상당한 비중으로 관여를 하는데, 그중에서도 메인 설정인 '별'과 관련된 서사는 칼리드에게 많이 몰려 있어서 칼리드 쪽의 감정적인 울림이 아무래도 크게 와닿는 듯. 어린 시절부터 줄곧 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별이 되겠다고 다짐하며,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두 별―이슈타르와 아레스―의 사랑 이야기에 해당하는 건 다름 아닌 에스텔과 칼리드니까.. 주인공의 '반려'이자 '파트너'로서의 남주가 아닌 메인 서사상의 남주는 아무리 생각해도 칼리드다(뇌피셜입니다 무시하고 지나가세요..


3명의 메인캐들 외에도, 에스텔에게 '레이디의 방식'을 알려준 클로렌스, 순수했지만 어리석었던 아버지 아이딘 백작, 로맨스 소설 덕후인데 무언가 숨기고 있는 2황자 이오지프 등 조연들도 매력적인 작품. 이 사람 저 사람 이해가 가지 않는 인간이 없어서 독자는 정말 숨이 차고 힘듭니다..ㅠㅠㅋㅋㅋ 끊임없이 내 속의 자아가 싸우게 만들고, 지금껏 가지고 있던 가치관에 대해 돌아보게 만들고, 누군가를 한없이 원망했다가 또 그 누군가가 한없이 애틋해져서 힘든 소설이지만, 그만큼 클라이막스가 벅차고 아름답다. 작가님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시간 많을 때 혼자 있는 곳에서 읽읍시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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