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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Romance

감상/ 답장을 주세요, 왕자님

by 뀽' 2019. 11. 21.

 

답장을 주세요, 왕자님  /  유폴히

★★★★★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


이제 난 당신을 알아 버렸고,

당신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영원히 만날 수 없으니,

이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도 없군요.


이제 내게 남겨진 몰락이 눈앞에 선합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아니면 거창하게 사랑까지 갈 것도 없이 그저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데엔 어떤 조건들이 필요할까. 상대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손을 잡아봤으면 그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조건’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복잡할 수도, 반대로 굉장히 단순할 수도 있다.


출판사의 새내기 편집자 코델리아 플로라 그레이는, 《공주와 기사》의 후속편 원고를 찾기 위해 작가님이 일러둔 골동품 가게를 찾아갔다가 그곳에서 수상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남 직원 한 명을 만난다. 사람인지 요정인지 모를 그 직원이 선물이랍시고 안겨준 고상한 서책보관함과 원고를 들고 돌아온 코델리아(이하 코코)는, 보관함 안에 넣어두었던 원고가 다음 날 감쪽 같이 사라지자 펄쩍 뛰며 다시 골동품 가게를 찾아가지만 범인으로 추정되는 그 요정 인간은 어디에도 없고. 분노로 휘갈겨 썼던 편지만 대충 보관함에 넣어뒀더니 세상에, 답장이 왔다《공주와 기사》에 등장하는 미남 조연 한량 왕자님, 아치 앨버트 윌리엄에게서.


소설 속 왕자님과 주고 받는 편지라니, 이 얼마나 로맨틱한 동화인가- 하다가도 두 사람이 주고 받는 ‘발칙한’ 내용들을 읽을 때면 현대 로코물을 보는 것마냥 경쾌하다ㅋㅋ 처음엔 책을 선물하고 독서 감상을 나누는가 싶더니 자연스레 상사 욕을 하고, 연애 상담도 하고, 그러다 어느샌가 편지에 적히지 않은 우울한 기분까지 눈치 채곤 따뜻한 위로를 주고 받는 사이까지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정한 펜팔로 끝났으면 차라리 쉬웠을 것을. 영원히 만나지 못할 이에게 너무 깊은 감정을 품어버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설렘은 순식간에 절망으로 바뀌어버린다.


때론 종이 위 활자에 불과한 ‘글’이 그 어떤 감각적인 정보들보다도 진실에 가까울 때가 있다. 책을 읽는 독자라면 모두 표지일러가 아름다운 것과는 별개로 흰 종이 위 검은 글자만 보고도 코코가 얼마나 선명한 붉은 머리를 가졌는지, 녹색 눈이 얼마나 사랑스런 빛을 띠고 있을지, 재잘거리는 높고 쾌활한 목소리는 또 얼마나 기분 좋을지 상상할 수 있잖아요? 또 양피지 위에 고풍스러운 필체로 적혀 있을 왕자님의 편지를 상상하고, 그가 얼마나 조근조근한 말투로 다정한 말들을 속삭이는 사람일지 상상할 수 있잖아요?! 네?!! (책상쾅


두 주인공 코코와 아치 모두 우리 교활하신 작가님에 의해 이미 자신들의 세계에 썸남들(?!)이 각각 존재하지만, 문제는 그 썸남을 보며 호감을 느끼는 순간에마저 서로를 떠올린다는 데서 이미… 아 망했어요 오늘 리암과 나눈 얘기를 꼭 아치 왕자님께 해줘야지!하는 코코나, 플로리안의 붉은 머리칼을 보며 코코의 머리도 저렇게 아름다운 붉은색일까 하고 있는 아치라니. 서간체 소설이라길래 소소하고 잔잔할 줄 알았나요? 아닙니다, 무려 시공간을 뛰어넘는 엄청난 사각관계(?)가 펼쳐짐. 진지한 연애상담과 귀여운 질투, 감정의 자각과 그에 따른 절망이 차례차례 드러나는 편지들을 읽다 보면 이 무슨 짝사랑 기억조작도 아니고 눈물 젖은 베개에 얼굴 파묻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됨..


두 주인공 뿐 아니라, 편지 속에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도 어찌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이 생동감 있는지 모른다. 그중에서도 아치 왕자님의 편지에 늘 등장하곤 하는 베데르 할아버지는 쓸데 없이 내적 친밀도만 높아져서 현실에서 만난다면 손 잡고 카페에 들어가 왕자님이 질려했던 그 수다를 몇 시간이고 들어드리고 싶은 마음임ㅋㅋ 조세핀과 노엘과는 갓 구운 따뜻한 시나몬 롤빵을 나누어 먹고, 줄리엣과는 펍에서 맥주를 마시며 연애 상담 하고 싶은 기분인데, 네, 이미 말했다시피 작가님은 아주 교활한 분이시고… 뒷배경처럼 풀렸던 자잘한 이야기 조각들이, 작품 중반부를 넘어 점점 맞추어지면서 숨겨져 있던 그림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던 코코의 어머니, 이름 모를 코코의 후원자, 정체를 알 수 없는 《공주와 기사》의 작가 앤 셀린. 수수께끼 같던 그들의 정체가 하나씩 밝혀지고. 마침내 《공주와 기사》 속에 등장하는 기사 아서 길런이 왜 에드위나 공주를 떠났었는지, 그 둘 사이에서 서책보관함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밝혀지는 순간 코코도 울고 나도 울었다. 그리고 모든 비밀이 밝혀지고 해결책을 찾은 것 같던 그 타이밍에, 왕자님의 답장이 끊겨버립니다(와장창


‘답장을 주세요, 왕자님’이라는 이 작품의 제목이 코코의 편지에 등장한 순간 단언컨대 울지 않은 독자 없다. 글자도 못 쓰던 기사가 수십 수백번을 연습하며 적은 공주님의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독자도 없다. 금발 머리 기사의 다정한 편지에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만 붉은 머리 공주님의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부디 읽어주세요.. 소설 첫머리에 등장하는 코코의 대사처럼, “이 책은 ‘진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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