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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Romance

감상/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by 뀽' 2019. 9. 2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  권겨을

★★★★☆

사랑은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되는 것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를 놓아줄 준비를 해 온 것 같았다.

 

※주의: 진 남주의 정체 등 주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글입니다.


소유욕, 죄책감, 애증 등 ‘사랑’이라는 감정이 한 가지 얼굴만 가진 것은 아니겠지만,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사랑이란 것은 본래 이런 형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소설. 


재벌가의 사생아로 태어나 아버지와 두 이복오빠에게 학대를 받으며 자란 주인공은 운명의 장난인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게임 속 악역이자 하드모드의 주인공 '페넬로페 에카르트'(이하 페페)에 빙의를 한다. 선택지 한 번 잘못 골랐다간 죽음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극한 상황에서, 0을 찍고 있는―어떤 놈은 심지어 마이너스다― 남주들의 호감도를 올려 제한된 시간 안에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야만 하는 페페. 그렇습니다, 이 소설 분명 역하렘이긴 역하렘인데 부둥부둥 힐링하며 사랑받는 거 따위 없다. 망할 남주놈들이 돌아가며 개소리를 하고 뒷통수를 치는 본격 여주 굴림물(...)


폭언은 기본에 식사도 썩은 음식, 거기다 목에 칼까지 들이밀어지는 그야말로 '하드모드'다운 상황 속에서도 페페는 야금야금 호감도를 잘 올려나가는데요, 그렇게 한푼 두푼 모은 호감도가 퀘스트 하나 삐끗 잘못 들어서는 순간 뚝뚝 떨어지는 건 정말 상상 이상의 공포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어떤 사람이 하는 말과 그가 짓는 표정, 그 속에 비추이는 감정보단 그 사람 위에 떠 있는 호감도 숫자가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 되는 현실이 이상하게 불안해질 때쯤. 호감도 숫자뿐 아니라 사람마다 그 호감도 바의 '색깔'이 다르다는 사실이 새삼 상기되고, 아니나다를까 호감도 숫자가 가장 높던 놈이 뒷통수를 칩니다. (부들부들


충격과 공포의 중반부 뒷통수를 지나 결말까지 진행되면서 점차 선명해지는 사실이지만, 숫자만큼이나 중요한 건 사실 나를 향한 그 사람의 호감이 어떤 ‘색깔’을 띠고 있는가 즉, 그 사람의 사랑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이다. 애증이 Max를 찍으면 얼마나 무서운가 다섯명의 남주들은 각각 극명하게 다른 사랑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만약 페페의 호감도도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면 아마 그 또한 남주에 따라 각기 다른 빛깔을 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사실, 여기서 이미 결판은 났다. 


오로지 엔딩 클리어를 위해 거짓된 감정만 보여주던 페페와, 그런 페페를 말없이 받아들이며 비뚤어진 감정만을 키운 상대의 결말은 처음부터 파도 한 번이면 무너질 모래성으로 결정나있었다. 제 감정에만 휩싸여 멋대로 상대를 휘두르려는 애증도, 선한 대의를 위해 그녀를 끊임 없이 의심한 죄책감도 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가장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였고 숫자도 가장 더디게 올랐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진심을 내보인 상대의 빛깔만은, 기쁘고 아름다우며 열렬한 사랑을 뜻하는 붉은 장미와 닮아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절대 해주지 않고 너랑 나랑 잘 맞으니 정략결혼하자는 소리를 하는 ‘그’의 머리 위 호감도 숫자가 겨우 76이라서 페페는 그의 마음에 사랑이 없다 판단했지만, 처음부터 붉었던 그의 호감도는 0이 1로 변하는 순간 이미 사랑이 시작된 것이었다. 도리어 너무 무거운 진심을 그대로 내어보이기가 겁이 나서 자각이 늦었을 뿐, 검붉은 소유욕이 99를 찍더라도 아마 깨끗한 붉은색의 사랑 1을 이길 수 없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런 그의 사랑은 숫자가 커질수록 페페의 정체와 소원, 꿈을 알고 이해하게 되면서 오히려 그녀를 보내줄 준비를 서서히 하고 있던 것이다


페페와 남주들의 서사에 대해서만 잔뜩 풀어놓은 감상이 되어버렸는데, 양아버지인 에카르트 공작이나 에밀리, 라온 등 조연의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 최종보스라 할 수 있는 '게임 노말모드 주인공이자 선역'인 이본의 숨겨진 설정들과 미스터리를 해결해나가는 전개가 등장인물들 간의 감정선과 긴밀히 연결되어 지루할 틈 없이 흥미진진하다. 초반에는 호감도 뚝뚝 떨어지는 게 공포였다면, 중후반부부터는 이본 캐릭터 때문에 정말 이거 공포물 아닌가 섬뜩할 지경. 그래서인지 피폐한 러브라인 때문에 가슴 아파할 시간조차 많이 없습니다, 너무 무서워요!ㅋㅋㅋㅋ


스펙타클한 전개 덕분에 피폐한데 피폐하지만은 않은 굴림물 되시겠다. 희망이 언뜻 보일 때마다 발밑이 꺼지는 전개 때문에 절망의 깊이는 깊지만, 늪속에 갇혀 질식한다기보단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용감히 그 늪속을 걸어나간다는 느낌이 강한, 그리고 마침내 그 용기로 자신의 감정까지 직시하게 되는 페페의 눈부신 정신적 성장이 돋보이는 결말이 참 따뜻하고 좋았다. 모두 이 소설을 읽으며 페페와 함께 절망하고 욕을 쏟아부으면서도 끝끝내 살아남아 행복을 쟁취한 것 자체로 복수를 이루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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