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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Romance

감상/ 캐스니어 비망록

by 뀽' 2019. 11. 1.

 

캐스니어 비망록  /  흰울타리

★★★☆

평범하게 행복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일생을 떠돌았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철부지처럼 저항하며, 그렇게.

그러나 물 위를 떠다니는 낙엽처럼 정처없던 마음도

비로소 하구에 닿았다.

 

제목의 ‘비망록’이라는 단어를 보고 뭔가 전쟁의 한복판, 거대하고도 애통한 서사로 사람 오열하게 만드는 작품이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모든 전쟁이 끝난 후, 소박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평범한 소시민들의 이야기…인데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무 자르듯 자 이제 아무도 안 싸우는 평화 시대 짜잔☆ 하는 건 아니잖아요? 이건 그렇게 종전 이후 찾아온 ‘평화’ 속에 자신도 속하기 위해 싸워야만 했던 사람들의 또다른 조용한 전쟁을 그린 소설이다. 


1년 전 더블린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램록, 그중에서도 대도시들 사이에 위치한 작은 깡촌 마을 캐스니어에 어느 날부턴가 강변에 천막을 치고 거지꼴로 살아가는 남자 하나가 나타난다. 인구도 얼마 안 되는 작은 마을엔 그 남자가 더블린인 군인이라는 소문이 금세 돌고, 강변 건너편에서 귀가 잘 안 들리는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열아홉살 아가씨 레일라도 어쩐지 그 남자가 꺼림칙하다. 1년 전 전쟁으로 외삼촌을 잃은 상처가 아직 남은데다 더블린과 램록하면 거의 몬태규와 캐퓰릿 급의 앙숙이기 때문에 경계심이 드는 건 당연한 일. 그런데 그녀가 곤경에 처했을 때 나타나 도와준 남자를 가까이에서 접하면서 레일라는 도리어 호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쯤했으면 다 알지요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집니다ㅋㅋ 자신을 에런 제너라고 소개한 남자는 제가 탈영해서 도망친 더블린 군인이며, 고향에 돌아가지 않은 채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인간이 너무 거지꼴이라(...) 적선하기 시작한 레일라와, 그런 레일라의 도움을 받아 점점 본연의 미남꼴(?)로 돌아가는 에런. 그렇게 꽁냥대던 이 둘은 국적이고 뭐고 원래 옆집 살던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사랑을 시작한다.


오 로미오 당신은 왜 몬태규인가요! 하며 원수 사이인 것을 통탄스러워 하는 그런 적국 남녀의 격정적이고 비극적인 사랑을 기대했다면 그런 건 없습니다(단호)ㅋㅋ 이 소설의 주요 갈등은 적국 사람을 사랑하고 말았다는 데에서 오는 고뇌나 고통이 아니라, 그저 평범하게 사랑하고자 하는 두 사람을 둘러싼 환경이 평화를 가장한 살얼음판이라는 데에서 나옴. 언뜻 평화로운 시골처럼 보이나 종전 후 할 일이 없어진 군인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행패 부리기 일쑤고,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더블린인이라면 원수로 생각하는 삭막한 분위기. 심지어 최근엔 '금발머리 더블린인 군인'을 찾는 현상수배까지 걸렸는데 눈치 있는 독자라면 다 압니다 저거 빼박 남주잖아!!!!


서로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두 사람임에도 이렇게 살벌한 주변 환경 때문에 독자는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다. 에런이 꾸는 악몽으로 언뜻언뜻 나오는 참혹한 전쟁의 기억, 마을을 들쑤시고 다니며 심하면 살인·성폭행까지 저지르는 램록의 군인들, 거기다 현상금을 노린 누군가가 언제 에런을 신고할 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까지, 정말로 외줄타는 기분인데.. 그런 가혹한 환경이기에 에런을 그저 에런으로 대해주는 사람들의 인간애가 더 빛나는 거겠지요 8ㅁ8...


시골 아가씨 레일라 시점의 ‘로맨스’로 시작했지만, 결국 이건 국가와 민족 등 거대 담론들에 잡아먹히지 않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애’의 작지만 따뜻한 승리를 말하고 있는 소설이다. 에런이 전장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사정,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적국에서 떠돌이 생활을 해 온 이유, 반드시 그를 생포하라는 문구가 붙은 현상수배까지, 모든 퍼즐 조각이 맞아떨어진 후 전해지는 메시지는 누구나 알고 있는 아주 기본적인 사실임에도 새삼 가슴이 울렁거린다. 누군가를 그의 소속이나 이해관계가 아닌, 그저 그 사람 자체로 바라봐주는 마음이 비록 처음엔 어리석어 보일지 몰라도 그건 결코 틀린 길이 아니다


레일라와 에런 사이의 감정으로 인한 갈등(오해나 싸움, 엇갈림 등)은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한 데다, 후반부 갈수록 레일라보다는 에런을 중심으로 ‘거시적인 개념들의 폭력 속에서 꽃피는 인간애’적인 서사가 주가 되는 흐름이기 때문에 남녀가 투닥대는 정통 로맨스물을 보고 싶었다면 의외로 취향에 안 맞을 수도. 사실 적국 남녀의 격정 멜로를 기대했던 저도 적지 않게 당황했습니다.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재치 있는 문장들이 물 흐르듯 잘 읽히고, 거기다 한 명 한 명 살아숨쉬는 캐릭터들까지 정말 잘 쓰인 소설인데도 다 읽고 나서 어딘가 허전한 건 ‘로맨스’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던 듯.


어어 그런데 일단 19금인 작품인만큼 19금 장면은 꽤 나옵니다 비록 전연령 러버인 저는 흐린 눈으로 빨리 넘겼지만ㅠㅠㅋㅋㅋ 19금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다소 평탄하게 흘러간 로맨스 서사의 허전함을 이런 장면들로 채울 수 있을 듯. 전쟁의 비인간성과 참혹함에 대한 고발, 그리고 그안에서도 결국 승리하는 인간애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었다. 대물림되는 증오와 원망은 저편에 접어두고, 다들 사랑합시다, 사랑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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