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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Romance

감상/ 120일의 계약결혼

by 뀽' 2019. 12. 20.

 

120일의 계약결혼  /  재겸

★★★

세상에서 가장 순진한 바람둥이라니


당신은 혹시 저를 벌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닐까요

 

※주의: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되어 있는 글입니다.


금방 사랑에 빠지고 또 금세 사랑이 식어버리는 천하의 바람둥이 마커스 행어. 그가 이번에 빠진 상대는 아름다운 공작부인인데, 뭐 유부녀라해도 일단 남편과 사별한 몸이시니 이해할 수 있다. 근데 이 부인의 취향이 유부남이란다. 환장 그래서 마커스는 유부남이 되기로 하고! 환장222 이 돌아버린 남주가, 가난한데다 키워야 할 조카딸까지 있는 엘루이즈에게 돈을 대가로 120일 기한의 계약결혼을 제안하며 미친 불륜쇼가 시작되는데! 대환장3333


작품 소개가 자극적이라 겁 먹고 백스텝하는 독자들이 꽤 있을 거 같은데, 이야기는 재치 있고 유쾌하며 생각보다 평화롭습니다(???). 불륜 지뢰, 후회남 불호인 내가 아무 문제 없던 걸 보면 누구나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을 듯. 단, 엄청난 막장극을 기대했다면 생각보다 막장은 아니라는 것. 몇몇 조연을 제외하곤 주요 인물 대부분이 상식적이다. 아들 새끼 멱살 잡는 애비와 조카놈 욕하는 고모, 주인 극딜하는 비서 등 매력적인 주변 인물들과, 그들에게 등짝 얻어맞으면서도 해맑은 남주 마커스마저 비록 불륜쇼를 하는 놈이지만 상식적이고 귀여움ㅋㅋ


당연히 마커스는 그가 노리던 공작부인이 아닌 계약결혼 상대인 엘루이즈를 사랑하게 되고, 엘루이즈 또한 다정한 이 남자에게 속절없이 빠져버린다. 그런데 여기서 서로 삽질하며 난리부르스를 칠 거란 예상과 달리, 의외로 둘은 서로의 마음을 빨리 깨닫는데! 문제는 급속도로 애정이 식어 최장 연애기간이 2개월 밖에 안된다는 이 남자를 대체 어떻게 믿느냔 것이다. 이번엔 다르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누가 믿어줄까, 모든 건 마커스 스스로 불러온 재앙 아니겠습니까.. 거기서부터 이 소설의 2막이자 진짜 갈등이 시작된다. 


침대까지 가기도 전에 사랑이 식어서 관계는 가진 적 없는 동정남이긴 하나, 과거의 연애 전적이 너무나 처참하기 때문에 엘루이즈 뿐 아니라 마커스의 비서, 고모, 심지어 그의 아버지까지도 그를 믿지 못하는데. 이 작품이 택한 갈등 해결 방식은 의외로 고전적이다. 저돌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바람둥이라니, 게다가 가짜 결혼식만 올렸던 전과 달리 이제 아예 혼인신고도 하자고 나오니 답은 뭐다? 도망이다. 그리고 바람 맞은 바람둥이(...)가 반성하고 후회하며 긴 시간 그녀를 기다리고 찾아 헤매는 것이 바로 로설의 왕도 아니겠습니까! 


마커스의 감정이 진실됨을 증명할 수 있는 건 절절한 고백이나 목숨을 건 행위 같은 것보다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 작품은 팡팡 터지는 강렬한 사건보단 긴 시간 동안 변하는 인물들 간의 섬세한 감정선을 통해 플롯을 이끌어나간다. 사건보단 감정선 위주의 전개이기 때문에 느릿하고 지루할 거라 생각하는 건 금물. 마커스와 엘루이즈의 로맨스엔 공작부인을 둘러싼 오해와 질투, 그리고 반전이 꼼꼼하게 엮여 있어서, 그리 큰 사건이 벌어진 것 같진 않은데도 감정선은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아주 격렬합니다ㅋㅋ 


단 엘루이즈가 요즘 로판 유행에 딱 들어맞는 유형의 주인공, 이른바 냉철한 이성을 자랑하며 할 말 다 하는 사이다 여주는 아님. 로판 주인공이라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엘루이즈는 자신의 관점에 갇혀 남들을 쉬이 오해하며, 후에 오해란 걸 깨닫고 후회하면서도 질투와 부러움으로 응어리진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 오히려 배운 여자에다가 시원시원한 벨루나 공작부인(+애비게일)이 요즘 독자들이 좋아하는 유형에 더 들어맞는 면이 있긴 한데ㅋㅋ 지난 몇년 동안 익숙해진 사이다 여주가 독자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해왔다면, 엘루이즈 같은 주인공은 굉장히 현실적이라 그녀의 감정과 고민들이 마음에 더 와닿는듯.


사이다보단 인간적인 감정들에 휘둘리는 주인공처럼,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악역’들도 평범해서 좋았다. 픽션에 흔히 등장하는 이른바 ‘싸패’나 ‘빌런’ 캐릭터들에 비해선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아무렇지 않게 약자 혐오 발언을 하거나, 제자의 공로를 자신의 것으로 돌리는 사람 등 누구나 한번쯤 접해봤을 현실 빌런들을 보고 있자면 잔잔하지만 생생한 분노가 차오를 수밖에 없음. 


괴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던 여주가 잘생기고 돈많은 바람둥이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되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하는 이야기라니, 이토록 현실과 동떨어진 동화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어떻게 이렇게 현실적인 느낌을 줄 수 있을까 싶어 신기한 소설. 동화를 원하는 사람과 현실성을 원하는 사람,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유쾌하고 깜찍하며 심지어 먹먹하기까지 한 수작이다. 다들 이 조신한 바람둥이(?)를 봐주세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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