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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Romance

감상/ 고리대금업자의 프라이버시

by 뀽' 2020. 4. 21.

 

고리대금업자의 프라이버시  /  라노브

★★★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살점 1파운드의 의미


나에게 너무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아직 당신이 내게 실망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제목을 보곤 초등학생 때 읽었던 <베니스의 상인>이 생각나는군 껄껄 하다가 프롤로그서부터 약간 당황했다. 아니 정말로 <베니스의 상인> 모티프잖아?!ㅋㅋ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급전이 필요했던 손힐 백작은, 악마라는 별칭까지 붙은 지독한 고리대금업자에게 거금을 꾸게 되는데요. 기한 내에 돈을 갚지 못할 시 치러야 하는 대가는 다름아닌 아들의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살점 1파운드다. 


차라리 내 심장을 담보로 걸라는 부성애돋는 백작과, 그런 백작을 비웃는 잔악무도한 절세미남 고리대금업자씨를 보며 음, 잘생긴 편 내 편 하고 있던 로판독자의 감은 백작의 사생아 딸이 등장하는 순간 맞아떨어지고. 아들새끼 살리겠답시고 백작은 그간 딸 취급도 안해주던 마리엔더러 계약서 훔쳐오라며 고리대금업자네 집에 잠입시킨다. K-장녀의 분노가 솟아오르지만 일단 여주와 남주가 동거하게 되었으니 참자. 그렇게 고리대금업자네 집에 가서 하녀 일을 하게 된 마리엔. 그러나 명색이 ‘악마’라던 고리대금업자씨는 잔인하긴커녕 쓸데없이 젠틀하고 친절하며 상냥한데?!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다. 밤 10시 이후론 방에서 절대 나오지 말라는 집사의 경고. 서재의 책 배열을 바꾸지 말라는 조언. 갑자기 분위기 나폴리탄괴담 그리고 까마귀 가면을 쓴 정체모를 역병 의사까지. 쓰고 보니 정말 괴담 소설이 따로 없는데 사실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가끔 피비린내가 날뿐이지 로맨스에 더 가깝다. 어른스럽고 다정하고, 심지어 순진해보이기까지 하는 고리대금업자씨는 마리엔이 계약서 빼돌리려고 온 스파이란걸 모르는 건지 그녀에게 한결같이 다정하기만 한데. 그 모든 다정한 순간들은 그녀에게도 그에게도 생애 처음 있는 일이라, ‘처음’을 함께한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서로에게 치명적인 비밀을 간직한 두 사람이기에 모든 것이 모래 위에 쌓아올린듯 불안하지만, 그래서 더 간절한 거 아니겠어요……. 


으스스한 초반 분위기와 달리 중반부는 의외로 감정선 위주의 잔잔한 전개를 따라가는데 결코 지루하지 않다. 상대가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될까봐, 그래서 배신감을 느끼고 떠날까봐 두려움에 떨면서도 아슬아슬 쌓아올리는 감정의 젠가 놀이가 흥미진진하게 이어지다보니 손바닥에 땀이 다 차요…. 예상치 못한 데서 자꾸만 마주치는 복병들 때문에 마리엔의 정체를 들킬까 마음 졸이기를 여러 번, 그를 사랑하면서도 몰래 계약서를 찾는 마리엔의 모습에 그녀와 함께 자괴감과 죄책감을 느끼기도 여러 번,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진실 앞에서 절망하기까지. 


이토록 다정하고 선한 남자가 왜 그리도 잔혹한 계약 조건을 걸었을까.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이 뒤통수를 때리는 얼얼함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안개 같이 모호하게 깔려있던 불안감이 뚜렷한 실체가 되어 결국 무릎을 꿇게 되는 처절함이 있다. 말 그대로 설마설마 하다가 그 설마가 사람 잡음. 야 너 설마? 야 너 언제부터? 야 너 이걸? 와씨 야.. 너..! 야! <<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앵무새가 되어버렸..ㅋ


클라이막스에 가까워질수록 전개는 점점 더 스피디해지고 숨가빠지는데, 얽히고설킨 감정선과 누구도 확실하게 믿을 수 없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그간 잠시 잊고 있던 ‘살점 1파운드’ 조항의 진의가 드러난다. 사실 <베니스의 상인> 결말 모르는 사람 없잖아요? 그래서 죽지 않고 저 조항을 빠져나갈 방법도 다 알잖아요? 근데 그걸 독자만 알았을까? 당연히 작가님은 그보다도 위에 서 계셨습니다……. 이 비인간적인 계약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깨달은 순간,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던 결말을 고리대금업자가 깨부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가 굉장하다. 


계획적이고 머리 좋은 고리대금업자가 정체를 숨긴 채 짜놓은 거대한 복수의 판 위에서 모든 이들이 놀아나는 내용이기 때문에, 언뜻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생각나기도. 대단한 주인공과 대단한 빌런이 서로 한 방씩 먹였다가 당했다가 하는 식의 스펙타클함을 원했다면 그런 부분이 좀 심심하게 느껴질 순 있는데, 애초에 이 소설은 그런 류의 작품이 아니니까요..ㅎㅎ 저는 주인공 두 사람의 러브라인 만으로도 너무 긴장돼서 심장이 쪼그라든지라, 도리어 그 외의 부분에선 고리대금업자씨를 전적으로 믿을 수 있어서 좋았슴니다.... (소설이 너무 지독해서 약간 지침ㅋㅋㅋㅋㅋ


너무 일찍 철이 들어야 했던 자존감 낮은 마리엔의 시점을 따라 비밀스러운 고리대금업자씨를 지켜보며, 그의 상처를 보듬는 동시에 마리엔 스스로도 성장하게 되는 서사가 매력적인 작품. 거기다 작가님이 인물들의 절절한 나레이션을 너무 잘 쓰셔서 후반부 갈수록 몰입도가 높아진다. 가볍지 않고 애절한 감정선과, 기승전결 잘 짜인 스토리를 찾고 있는 분들에게 추천. 




+) 남주인공인 고리대금업자씨의 이름을 감상글에 쓰지 않은 건 의도적인 겁니다. 으후후후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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