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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Romance

감상/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by 뀽' 2020. 5. 20.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  이보라

★★★★☆

가난한 마음에 사랑을 알려주기 위하여


아무 것도 해 주지 않아도 사랑해 주겠다는 걸

알려 볼 생각이었다.

 

※주의: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되어 있는 글입니다.


신데렐라는 왕자님과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았을까. 시댁의 물싸대기를 극복하고 재벌과 결혼한 서민은 그 후로 괜찮았을까. 사실 우리 모두 동화 같은 해피엔딩 따위 현실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어른들도 그러시지 않는가, 너무 기우는 결혼은 하는 거 아니라고. 거기엔 속물적인 이유도 물론 있겠지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유식으로 캐비아를 먹던 귀하신 공주님과, 길거리 도넛을 사먹는 이방인 혼혈 사생아가 과연 오해 없이 온전한 소통을 하는 게 가능할까? 신데렐라가 귀족이었다는 건 잠시 잊자


신분 차이 나는 만큼 둘이 손 꼭 맞잡고 결혼해도 모자랄 판에,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은 시작부터 뒤틀렸다. 외모도 돈도 다 가졌지만 그놈의 혈통이 문제였던 남주 윈터는 어마어마한 돈을 내고 공주님과 결혼해 작위를 받으려고 했으나. 빌어먹을 왕세자가 돈 꿀꺽 받고 공주랑 결혼시켜놓곤 정작 왕실을 해산시켜버렸다! 그렇게 눈앞에서 공중분해 된 귀족 작위의 꿈. 나라 파산을 막으려 이 한 몸 희생해 결혼했던 바이올렛 공주님은 결혼 당일 첫눈에 반해버린 남편에게 그렇게 염치 없는 죄인 신세가 되어버렸다.


파티에 초대해 망신 주는 걸 즐기는 시부모, 추근대며 희롱하는 시동생, 점차 악화되는 건강, 그러나 꾀병 부리지 말라며 비웃는 주치의, 그리고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차가운 남편. 3년 간 지옥 속에 살던 바이올렛은 결국 죽음을 택하는데, 어라. 눈을 떴더니 남편 몸에 들어와 있다?! 그렇습니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이것은 영혼체인지물. 그야말로 제목값 역지사지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ㅋㅋ


바이올렛이 벼랑 끝까지 몰려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던 상황과, 무례하기 그지 없는 윈터의 폭언까지 합쳐져 작품 초중반까진 매끄럽게 잘 쓰인 ‘남주 후회물’ 향기가 물씬 난다. 특히나 몸이 바뀐 후 윈터가 바이올렛이 처했던 그 지옥 같은 상황을 깨닫는 데서 오는 후련함과, 후회남아 굴러라! 더 굴러..! 하는 마음이 드는데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오히려 ‘윈터’가 어떤 인물인지 바이올렛도 독자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이 남자가 너무 가여워 엉엉 울게 되는 기묘한 독자후회물 소설. 


아름답고 기품 있는 공주님이 저같이 천박한 이방인을 사랑해 줄 거라곤 감히 상상도 못했던 윈터. 생모에게 버림받고 친부와 계모에겐 이용당해온 이 남자가 할 줄 아는 표현이라곤 돈을 주는 것뿐이었어서. 제가 가치가 없어지면 버림 받을 거라 생각한 이 마음이 가난한 남자는, 사랑하는 공주님을 위해 먹지도 자지도 않고 최선을 다해 돈을 벌고 있었으니..ㅠㅠㅠㅠ 바이올렛이 가여워 울다가, 윈터가 가여워 울다가, 마침내 윈터를 끌어안는 바이올렛을 보며 오열하는, 그야말로 따뜻한 눈물로 가득한 피폐물.


영혼체인지 소재라 해서 둘의 오해가 로코로코하게 쉬이 풀리지 않을까 어림짐작할 수도 있는데 아니요(정색) 작가님은 사람 마음 설레게 간지럽히다 갑자기 진창에 처박기 선수시라, 잠깐 방심한 순간 독자가 충격 먹고 영혼탈출 주인공들은 이승탈출 하는 적이 한두번이 아님. 안 그래도 상극이라 서로 오해하기 쉬운 두 사람인데, 둘의 불화를 양분 삼아 호의호식하는 기생충들이 구축해놓은 악은 너무나 견고하다.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비극 속에서 사랑하는 이를 위해 결국 죽음을 택하는 주인공을 보고 있으면 울면서도 이게 카타르시스구나 싶어 흥분됨(???)


하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은 죽음/자살을 결코 낭만적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사랑을 위해 죽는 용기보다 더 위대한 것은 사랑을 위해 진창 속에서도 ‘계속 살아나갈 용기’ 아니겠어요..?ㅠㅠㅠㅠ 죽음이 아니라 삶을 각오하고, 믿지 못하는 상대에게 나는 당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해도 당신을 사랑하노라 끊임없이 속삭인 용기 덕에 마침내 서로의 고통뿐 아니라 서로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게 된, 눈물겹지만 행복한 이야기.


아무도 이게 피폐물이란 걸 얘기 안 해줘서 정말 마음의 준비 조금도 못하고 당했(?)는데요..ㅋ..ㅋㅋ.... 섬세한 감정선과 예측이 안 되는 사건 전개, 개별적인 악역 캐릭터를 넘어 존재하는 뿌리깊은 ‘사회구조적인 악’에 대한 묘사, 그리고 그 악의 장벽을 뛰어넘게 만드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모두 들어 있는 작품입니다... 피폐한 거랑 별개로 가슴께가 간질거리고 심장 덜그럭하고 가끔씩 웃기기까지 한, 로맨스물에 바라는 모든 게 들어있는 띵작이니 로판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꼭 읽어보길 강력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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