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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Romance

감상/ 마음이 이끄는 대로

by 뀽' 2020. 9. 16.

 

마음이 이끄는 대로  /  틸다킴

★★★☆

지친 이들을 위한 다정 야릇 힐링물


이게 제 인생을 망치는 일이더라도,

제 의지로 망칠 수 있게 내버려두세요.

 

이 피폐 저 피폐, 갖가지 피폐에 지쳐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신음하던 시절, 어느 다정하신 분의 추천을 받고 읽게 된 힐링물. 잔잔하고 따뜻한 작품으로 유명한 작가님이신지라 고민 않고 시작했는데, 정말 밀려드는 설탕의 홍수 속에 아아 저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절규하고 머리깨고 오열하는 것에 지친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


주인공 강이재는 부모에게 버려지고 보육원에서 학대를 받다, 신기가 있는 게 밝혀져 용한 무당 밑에 들어가 자란 그야말로 박복한 인생이다. 죽어서도 편할 팔자가 아니었는지 전혀 모르는 세계에서 헤일리 던컨이라는 공작 영애의 몸에 빙의했는데 어쩐지 이쪽도 아비에게 학대받는 처지. 거기다 결혼 상대인 국왕 로더릭은 심지어 원귀 핫플레이스다. 폐하 대체 어떤 인생을 사신 거예요 엄청나게 좋은 관상을 가졌음에도 끔찍할 정도로 많은 수의 원귀를 달고 다니니 제정신일 리가 있나. 광증에 시달리는 왕을 돌려놓기 위해 헤일리, 아니 이재는 퇴마를 하기로 하는데..!


이렇게 적으니 뭔가 스펙타클한 퇴마물 같아 보이는데, 정확히는 퇴마물은 맞지만 굉장히 잔잔하고 평화롭습니다. 이 작품의 매력은 시도 때도 없이 사건이 벌어지고 그걸 해결하는 식의 전개가 아니라, 양인들 사이에서 나무를 깎아 원귀 퇴치 천하대장군을 만드는 여주의 엉뚱한 평화로움에 있음ㅋㅋ 이 무슨 동양과 서양의 혼종..!스러운 분위기가 굉장히 신선하고 재밌는데, 거기다 로더릭과 이재 사이에서 벌어지는 귀여운 오해와 맛깔난 티키타카 대화가 힐링 로코 분위기를 제대로 살려낸다. (천하대장군이 성인용품(!)으로 오해받는 진기한 광경을 볼 수 있음


얌전한 듯 하면서도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주인공 이재가 사랑스럽고, 거기다 남주인 로더릭은 그야말로 클래식한 연상 다정남. 서양 왕족/귀족인 등장인물들이 쓰는 말투가 현대어에 가까운 가벼운 말투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데 오히려 그 덕에 분위기가 너무 진중하거나 무겁게 처지지 않은 듯. 염병천병하는 주인공들에, 현실감 넘치는 말투에, 작가님 특유의 음성지원되는 대사까지 합쳐지니, 이건 뭐 거의 연애 바이럴 마케팅이에요… 너네 연애 외않헤? 연애가 이로케 달콤하고 야하고 재밋는데 웨? 라고 외치는 수준. 아주 핑크핑크 몽실몽실해서 제 광대가 다 아파요 작가님 8ㅁ8


다만 이 작품에 말랑달콤힐링 외에 다른 점―스피디한 사건 전개나 머리 쓰는 정치 싸움 등―을 기대했다면 김이 빠질 수도. 일단 이 소설은 이재와 로더릭의 연애와 감정선, 그리고 더 나아가 이재가 그동안 스스로를 가두고 있던 마음의 울타리를 부수는 서사가 메인이기 때문에 주인공 두 사람 외의 다른 캐릭터들이나 정치적인 상황에 대한 묘사는 놀랍도록 적다. 그야말로 사건 전개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도로만 정보가 주어지고, 그것도 크게 반전이라든지 하는 충격 요소 없이 잔잔한 편. 최종빌런캐가 등장하자마자 독자들 모두 아 쟤가 빌런이겠구나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근데 주인공들만 모름


독자와 이재에게 주어진 정보가 똑같은 상황에서도 이재만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구간에서는 약간 답답했고, 무엇보다 악역 캐릭터에 대해 ‘얘는 악역이야’ 외에 주어진 캐릭터성이 거의 없다보니(일단 분량이 없습니다..) 결말부에서 그 악역과 싸우는 장면의 긴장감이 좀 떨어지긴 했다. 하지만 그건 제가 힐링물에서조차 치열한 수싸움과 긴장감 넘치는 텐션을 원하는 사건물 처돌이라서 그렇구요ㅋㅋ 조연과 빌런 등의 주변 인물, 그리고 정치나 전쟁 등의 상황 묘사가 빠진 자리엔 그만큼 이재가 겪는 내면의 싸움, 외로움을 이겨내는 서사가 들어있으니, 말그대로 완벽하게 ‘힐링’에 집중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은 것 같아서, 누구 하나 나를 믿어주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서 언제부턴가 스스로 마음에 자물쇠를 걸어놓고 사는 듯한 기분은 각자 그 정도에 차이는 있더라도 누구나 한번쯤 느껴봤을 테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너무 조심할 필요 없다고, 그냥 한 번쯤은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도 괜찮지 않겠냐고 다정하게 말하는 소설. 피를 원하는 저같은 독자(ㅋㅋㅋ)에게도 이런 ‘쉼표’ 같은 작품이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요. 간만에 잔잔하게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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