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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Romance

감상/ 일어나지 않은 것들에 관하여

by 뀽' 2020. 3. 3.

 

일어나지 않은 것들에 관하여  /  서사희

★★★

한편의 철학적인 낭만 동화


모든 기억이 없어졌으면 했었다.

모든 것이 일어나지 않은 기억이었으면 했었다.

그러나 모든 생을 다 가지고 살더라도,

모든 생을 다 잃고 죽더라도.

가지고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생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그게 이번 생이었으면 했다. 

 

‘완벽한 이해’라는 것만큼 ‘오해’와 가까운 것이 있을까. 사람은 궁극적으로 모두가 서로에게 타자이며,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부딪히는 일이다. 그러니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오해와 무지의 영역이 없을 것이라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무지의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일 테다. 


감상문 초장부터 골 때리는 얘기했다고 도망가지 말아주세요, 왜냐하면 이 작품은 포로로 끌려와 후궁이 된 아름다운 공주와, 왕의 명령을 받아 그녀를 감시하는 기사의 낭만적인 NTR 러브 스토리니까 8ㅁ8!!!! 전연령가입니다.. 


총애받는다곤 하나 별궁에 갇혀 바깥 세상 소식 하나 알지 못하는 후궁, 아델하이드. 왕은 그녀를 감시하면서 호위하라고 매번 기사를 보내는데, 보내는 기사마다 아름다운 아델하이드에게 홀려 왕에게 죽임을 당하고. 왕은 무슨 심보인지 이번엔 자그마치 용을 죽이고 돌아온 영웅, 도미닉에게 그 기사 역할을 맡긴다. 이 고지식하고 충성스러운 기사는 과연 후궁에게 홀리지 않고 무사히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데 네, 너 나 우리 모두 다 알지요. 두 사람은 결국 사랑에 빠질 것이란 걸ㅋㅋ


그러나 이 흔한 로맨스 클리셰 같은 설정은 결코 흔하지 않은 방식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기사 도미닉의 시점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한 챕터가 끝나고나서야 아델하이드의 시점으로 바뀌는데, 시점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독자는 도미닉의 시선으로 읽었던 세계가 전부 오해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델하이드가 지었던 표정, 그녀의 웃음 소리, 그녀와 나눴던 대화가 모두 재해석되기 시작하고, 늘 순진하고 무지해보였던 그녀가 실은 얼마나 절박하게 사유하는 존재였는지 깨닫는 순간 세상은 뒤집힌다.


미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해야 했던 여자와, 살아남기 위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삶을 살아온 남자. 정반대의 세계를 살아온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자못 철학적이지만 이것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점차 변해가는 두 사람의 감정이 너무나 생생해 쉬이 이입이 되기 때문이다. 무지와 오해에서 벗어나 그녀가 품은 거대한 비극의 끝자락이나마 목격한 도미닉, 그리고 그런 도미닉의 존재에 비로소 고독에서 벗어나 기쁨을 느끼는 아델하이드가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은 불가항력이다.


그러나 아델하이드는 뭐다? 유부녀다ㅋㅋㅋ 그렇습니다 이것은 NTR물 의문을 제기할 줄 모르던 고지식하고 충성스런 기사가, 감히 제 앞을 막아서고 후궁의 편을 든 순간 왕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요? 위기감이 고조됨과 동시에, 애초에 왕이 도미닉을 아델하이드의 기사로 보냈던 이유가 밝혀지고 상황은 극적으로 치닫는데..! 


중요한 스포일러는 배제한 채 감상문을 쓰려니 좀 밍숭맹숭한데.. 단권 분량의 짧은 소설이고, 이야기도 주로 세 사람(아델하이드, 도미닉, 왕 안톤)이 나누는 대화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화려하게 팡팡 터지는 스펙타클함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대신 이 작품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주고받는 말과 시선의 텐션이 상당함. 평범하게 웃으며 말하고 있는 왕은 언제 갑자기 칼을 꽂을지 모르고, 속을 알 수 없는 아델하이드의 침묵과 외면 한 번에 읽는 독자 심장이 철렁 떨어지잖아요...


후반부에 이 모든 비극을 해결할 수 있는 ‘정답’이라고 주어진 것이 마치 디즈니에 나올 법한 "중요한 건 네 마음가짐이란다~"처럼 굉장히 근본적이고도 허무한 진실이라 약간 당황하긴 했는데ㅋㅋ 외전까지 모두 읽고 나니 그조차도 작가님이 두 사람의 감정선과 서사를 깊이 있게 만드는 장치로 잘 녹여내셔서 결과적으론 모두 좋았다. 


철학적인 대화의 비중이 꽤 높기 때문에 현학적이라는 리뷰가 간혹 보이지만 개인적으론 이 모든 대화가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의 세계가 서로 부딪히고 깨져서 마침내 ‘자신의 몰이해’를 이해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꼭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있었기에 마침내 ‘내겐 일어나지 않은 것들’로 가득해 나와는 다른 당신의 세계이지만, 그 다름마저 온전히 사랑한다는 절절한 고백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본다. 켜켜이 쌓아올린 감정의 탑이 매우 견고하기 때문에 더 눈물 나는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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