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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Romance

감상/ 유월의 복숭아

by 뀽' 2019. 10. 3.

 

유월의 복숭아  /  유폴히

★★★★☆

그 날 그녀는 복숭아를 먹었을까, 먹지 않았을까


줄리앙, 있잖아요. 기억은 만들어져요. 알아요?

기억은 내가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 수 있는 거라고요.

 

공작가의 아름다운 레이디와, 그 레이디를 찾아온 세 명의 구혼자가 있다. 한 명은 눈빛이 흐리멍덩한 부자, 한 명은 시를 외는 가난뱅이,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어쩐지 차갑고 무뚝뚝한 미남 공작님. 여기까지만 봐도 아 저 미남을 공작님을 택해야 하는군! 하고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의 주인공 레아도 알지만ㅋㅋ 문제는 이 공작님이 구혼자면서 구혼을 안 한다. 다른 두 명이 열렬히 구애할 동안 제 영지에서 가져온 복숭아를 깨끗이 씻어 손수 껍질을 까 먹여준 것 외엔 구혼은커녕 피해다니기만 하는 이상한 공작님


이 작품의 키워드가 '회귀물'이라는 데에서 다들 눈치챘겠지만 레아는 결국 오답을 택한다. 세 명의 구혼자와 두 번의 오답, 그리고 두 번의 회귀. 가난과 폭력에 시달리거나, 보석으로 장식된 방에 감금되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 채 살거나. 두 번이나 비참한 결혼 생활을 경험한 레아는,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세 번째 기회 앞에서 이번엔 결혼 따위 안해!!! 하고 선언을 하는데…… 미친 여자처럼 전생 얘기를 떠들었더니, 이번 생에도 복숭아를 씻고 껍질을 까고 있던 공작의 안색이 변한다. 그리고 그 날부터 갑자기 그는 세상 다정하게 돌변하는데!


보는 사람이 다 애처로워질 정도로 절절하게, 거의 토해내듯 사랑을 고백하는 줄리앙 레날 공작에게 결국 레아도 마음을 내어주게 되고. 잘생겼지, 돈많지, 다정하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그와 결혼해 행복한 신혼을 보내는데, 이게 끝일 리가 없지요. 줄리앙이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비밀의 방 문을 연 순간, 레아는 제 남편에 관한 무서운 진실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써놓으니 무슨 로맨스릴러 같은데 스릴러 맞는데? 미스테리한 전개이긴 하나 분위기는 고전 동화처럼 아름답다. 라벤더 숲에서 나는 향기와 복숭아를 씻는 물소리, 거기에 재기발랄한 레아의 재잘대는 목소리까지, 그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문장들은 스릴러 같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낭만적이다. 특히나 2부, 줄리앙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두 사람의 '진짜 첫만남'에선 레아가 너무도 사무치게 사랑스러워 일개 독자 주제에 줄리앙과 함께 첫사랑의 열병을 앓아버렸다고요 으ㅇㅏ아아ㅠㅠㅠㅠ


지난 두 번의 생에서 줄리앙이 어떤 심정으로 복숭아를 씻고, 제 손으로 까서 레아의 입에 넣어주었을지 생각하면 감히 마음이 아프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파도 같은 그의 사랑이 누군가에겐 절절하고 감동적이겠고, 또 누군가에겐 숨 막힐 정도로 무서울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건 줄리앙의 상황에 처하면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는 것. 제 생애 모든 아름다운 기억이 모두 한 사람의 선물이었다면, 그 한 사람을 위해 모든 생을 바치는 이 집요하고 거대한 감정은 당연하다고까지 느껴질 정도다.


줄리앙의 과거와 그의 정체(?)에 관한 힌트들은 초반부터 상당히 여러 번 주어지는 터라, 매번 헛다리만 짚는 영 눈치 없는 레아 같은 독자가 아닌 이상 줄리앙의 비밀을 70~80% 정도는 1권 중반부 즈음에 예측할 수 있다. 오랜만에 본다는 이야기, 그녀와 함께 마흔이 되는 일을 수백번도 더 상상했다는 말, 그녀에 대해 너무 많은 것들을 이미 알고 있는 태도 등 모르기가 어렵지만, 그 모든 비극이 얼마나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밝혀지는 순간 가슴이 선득해지지 않을 독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독자는 스마트폰 속 듣지도 못할 레아에게 끊임 없이 중얼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레아야 너 그 때 복숭아 먹었니, 안 먹었니? 먹었어 안 먹었어?!!


'기억은 만들어진다'는 말과 함께 삭막했던 줄리앙의 과거를 레아가 따뜻한 기억으로 덧칠하여 수정해주던 장면에선 감동의 눈물만 주륵주륵 흘렸었는데. 모든 진실이 밝혀진 후엔 레아가 복숭아를 먹었던(혹은 안 먹었던) 기억이 진짜 기억인지 덧칠된 기억인지 확신할 수가 없어서 미칠 것 같은 상황이 되어버린다. 양이 어린 왕자의 장미를 먹었을까 먹지 않았을까, 그 작은 사실 하나에 온 우주의 별들이 반짝이며 웃을지 아니면 온통 눈물방울로 변할지 결정된다며 걱정하던 생텍쥐페리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래서 먹었을까, 먹지 않았을까. 정답은 이 소설의 결말에 나와있다. 친절하신 작가님은 팽이가 휘청거리던 장면에서 갑자기 영화를 끝내버려 관객들이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던 모 영화 감독처럼 그런 잔인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물론 저는 그런 미친 결말도 좋았을 것 같긴 하지만ㅋㅋ 궁금하면 다들 책 사서 봅시다. 이 책은 그럴 값어치가 있습니다(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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