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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BL

감상/ 적해도

by 뀽' 2020. 8. 7.

적해도  /  차교

★★★★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상냥한 악(惡)

 

싫다고 하거나 화내는 거 못하겠으면,

그냥 나한테 뛰어와요.

그럼 다 괜찮아질 거예요.

 

약쟁이 싫어하시나요? 모럴리스 중범죄자는? 피폐한 것도? 저도 그랬습니다만 취향 위의 필력이라는 것도 있나 봅니다. 심지어 로맨스만 완독하고 BL은 이것저것 깔짝대며 맛만 보던 인간이 뜬금없이 멱살 잡혀 완독한 BL 장르 베스트셀러 중 하나. 마약을 제조하기 위해 ‘적해도’라는 외딴 섬을 찾은 두 객(客)과, ‘이매’라는 알 수 없는 호칭으로 불리는 그 섬 노예의 이야기. 

 

늘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노예 이매의 시선으로 본 객은 키가 훤칠하고 좋은 향기가 나며 목소리도 나긋나긋한, 그야말로 신비롭고 매력적인 인물이다. 의도치 않게 마주한 얼굴마저 가슴 덜컹할 정도로 잘생긴 그 손님은 이매가 평생 겪어본 적 없는 친절을 당연하다는 듯 베푸는데. 이름을 묻고, 인사를 하며, 이매씨가 차려준 식사가 아주 맛있었다고 웃어주는 이 남자. 이분이 바로 주인‘공’이자 마약 메이커인 기현오 씨 되겠습니다ㅋㅋ 

 

보면 알지만 사실 기현오 입장에선 특별한 친절을 베푼 게 아니었다. 통성명과 인사, 처음 보는 사람이니 존댓말을 쓰는 등 사람 대 사람으로서 평범히 대했을 뿐인데, 어째 매번 돌아오는 이매의 반응이 기묘하고. 결국 이매가 이장 아들에게 폭행 당하는 장면까지 목격하게 되어 그 자리에서 구해줬지만, 정작 이매는 이런 폭력이 익숙한 듯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반응이라 마음 한 구석이 싸늘해진다. 이를 기점으로 섬의 실태를 파악하게 된 기현오는, 동료인 남정태와 함께 적해도 사람들을 모조리 파멸시킬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여기까지 보면 기현오와 그의 동료 남정태가 악을 처단하는 멋찐 심판자 같아 보이지만,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놈들은 마약을 만들고 유통시키는 악질 범죄자들이라는 것을ㅋㅋ 당연하지만 이들이 택한 심판의 방식은 결코 정의롭거나 선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에게 구원받는 섬노들조차 소름 끼쳐 할 정도로 잔인함. 그러나 이런 무시무시한 ‘청소’라도 간절했을 정도로 적해도 사람들의 행태는 끔찍했으니… 정의와 선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선, 악을 심판하기 위해 다른 악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기현오의 이런 섬뜩한 면모가 이매 앞에선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다는 게 포인트ㅋㅋ 그게 더 섬뜩한 거 아니냔 생각이 들지만 뭐, 우리 다 그런 거 좋아하잖아요? 빻은 취향!!! 계략에 능한 이 통제광은 뒤로는 사람들 고문하고 죽이는 주제에, 앞에선 이매를 품에 안고 둥기둥기 우리 이매씨~하며 작은 입에 쉴 새 없이 먹을 것을 넣어주는 염병천병 다정한 남자다. 그리고 이매를 향한 기현오의 측은지심과 호감이 점차 성애적인 감정으로 바뀌어가는 흐름도 매우 좋았음. 

 

선악을 나누는 기준을 모르고 호오도 표현할 줄 모르던, 누가 봐도 순진한 이매가 이 미친 통제광의 계획을 매번 벗어나는 것도 좋았다. 기현오가 짜놓은 판 위에서 유일하게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이매가 선사하는 클라이막스의 쾌감이 상당함. 다만 적해도 사람들을 심판하는 흥미진진한 1부를 지나, 2부(3~4권)에서부터는 섬에서 탈출한 이매가 극히 의존적이고 수동적으로 구는 노예의 습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주제는 좋지만 전개가 늘어지는 측면이 있어 호불호가 갈리는 듯. 개인적으로도 2부 내용은 단권으로 스피디하게 전개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 아쉽다. 

 

아무튼 약쟁이 소설이라 그런가 독자도 마약한 것 같이 빨려 들어가는 엄청난 소설ㅋㅋ 처음부터 끝까지 이 주인공수놈들 정말 숨쉬듯 마약을 하는데요 고문과 살인은 덤 그와중에도 마약은 절대 손대서는 안 되는 나쁜 거라는 인상을 주는 게 신기하다. 보통 ‘매력적인 악인’을 그리다보면 매력 때문에 악이 묻히는 경우가 있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악인이 누군가에겐 구원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악에 대한 그 어떤 변호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정말 좋았다. 모럴리스 힘들어하는 나 같은 독자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던 신비스런 분위기의 매력적인 힐링물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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