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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BL

감상/ 하베스트

by 뀽' 2021. 1. 10.

하베스트  /  사빅

★★★

느리고, 조용하게, 침식해오는

 

그날, 그렇게 해서 죄가 태어났다.

 

※주의: 강하게 취향을 타는 비도덕적 요소를 다룬 작품입니다.

 

근친입니다. 형제 근친이에요. 짭 아니고 유사 아니고 이복도 아니고 양쪽 부모님 모두 같은 진짜 레알 생짜 찐근친이니까 못 보시는 분들은 얼른 백스텝합시다ㅋㅋㅋㅋ 새해를 근친물로 시작할 줄이야

 

왕국 구석에 있는 작고 평화로운 산골 마을 사로나. 그곳의 인망 있는 사냥꾼과 약초사 부부 슬하에 아름다운 두 아들이 있었으니. 알파로 태어난 첫째 테스는 반듯한 성격에 전사의 기질이 뛰어나 어릴 적부터 수도를 오가며 교육 받는 자랑거리였고, 둘째 놋시는 선량하고 야무져 어머니와 함께 산을 타며 약초를 캐는 사랑스런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림으로 그린 듯 화목한 이 가정은 놋시가 오메가로 발현하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는데.

 

오메가버스에서 늘 문제는 히트사이클이죠ㅠㅠㅋㅋ 오메가가 주기적으로 앓는 열병은 주변인들을 짐승으로 만들기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고 마을이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지고… 그래서 본인과 주변의 평화를 위해 오메가는 수도로 가 위에서 정해주는 알파와 혼인해 보호받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돈 없고 백 없는 오메가는? 과연 멀쩡하게 혼인시켜줄까? 착하고 예쁜 둘째를 추잡한 미래가 기다리는 곳에 보낼 수 없던 어머니는 놋시가 오메가라는 걸 철저히 숨기기로 하는데! 그리고 더 추잡한 미래가 와버렸다

 

사실 어떤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들을 눈 뜨고 빼앗기려 하겠어요…. 아들을 지키고자 스스로 독물까지 마신 어머니를 과연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다만 어렸을 땐 버섯독으로 잠재울 수 있던 놋시의 열병이 갈수록 통제가 되지 않자 알파인 첫째 아이의 옷을 슬쩍하기 시작한 것부터 아 망했어요.. 산꼭대기에서 티끌만큼이라도 비뚠 방향으로 굴려진 돌은 가만 놔둬도 본래 가야했던 바른 길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눈앞의 위기를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했던 작은 부도덕이 점차 몸집을 불리며 돌이킬 수 없는 근친의 길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그 타락의 과정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색이라 할 수 있는 담담하면서도 집요한 문체와 만나 배덕감이 두배가 됨ㅋㅋ 아주 좋았다는 뜻입니다^^ 난 썩었어.... 대화가 극히 적고 대부분이 빽빽한 줄글로 이루어진 작품이라(따옴표 찾기 힘들 정도)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데, 가독성이 좋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마치 저 먼 땅의 아스라한 고전 설화를 그곳의 문장 그대로 번역한 걸 읽는 기분이 들어서 신기하고 좋았음ㅋㅋ 알파를 ‘첫째 가는 이’라 하고 오메가를 ‘마지막의 주인’이라 부르는 등 이 작품만의 어휘로 만드는 분위기와 세계관이 있는데, 그게 굉장히 매력적이다.

 

문체 특성 상 스펙타클한 사건보단 인물의 심리와 감정선을 굉장히 꼼꼼하고 고집스럽게 묘사하기 때문에 전개 속도로만 보면 느린 편인데, 이게 작품 소재인 ‘근친’과 제대로 맞아떨어졌다는 느낌. 죄의 계기는 어머니의 행동이었지만 여기에 가속도를 붙인 건 자신이 동생에게 욕정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형 테스인데, 그가 순진했던 놋시의 몸과 마음을 천천히 한단계씩 길들여가는 과정, 그리고 반대로 놋시 쪽에선 여기까진 괜찮겠지 괜찮겠지 하며 형을 따라가다가 죄의식에 잡아먹혀 허덕이게 되는 감정선이 정말 진하고… 독합니다…….

 

다만 감정선 서술 위주의 느린 호흡이 5권 내내 이어지다 보니 확실히 지치는 감이 있고, 특히 3권부터는 전쟁과 살육, 배신 등의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만큼 박진감과 속도감을 살리는 빠른 전개가 아쉬워지긴 했다. 돌아가는 상황 불안해죽겠는데 씬이 100페이지야!ㅋㅋㅋㅋ 별개로 씬이 너무 야해서 전연령러버는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작품 소개에도 나와있듯 이 작품은 ‘죄를 선택한 형과 죄를 잊지 못하는 동생’의 이야기라, 형인 테스의 다정하고도 계략적인 면모가 부각되는 데 비해 상대적으로 놋시 쪽은 수동적으로 느껴진다는 점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 듯. 하지만 테스와는 다른 놋시의 이러한 태도가, 두 사람은 형제이며 근친상간은 죄라는 사실을 매 순간 상기시켜 독자가 절대적인 도덕적 기준을 잊지 않게 만드는 동시에 끊임없이 배덕감을 선사하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 얼레벌레 미화되고 이런 거 없어요 근친은 근친임(단호)ㅋㅋㅋ

 

소재도 문체도 정말 이렇게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까 싶은 작품인데, 취향에 맞기만 하다면 이 작품이 주는 독한 여운에 빠져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을 듯. 서서히 죄에 침식되어가는 섬세한 감정선이 일품인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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