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ovel/BL

감상/ 하프라인

by 뀽' 2020. 9. 28.

하프라인  /  망고곰

★★★

청량하고 건강하며 눈물어린 19금

 

첫 경험을 했다.

약 10년 동안 혼자 좋아하던 상대와.

 

청량한 19금? 이 무슨 형용 모순이냐 싶겠지만 그것은 실재했습니다. 19씬이 많고 길기로 유명한 작품인지라 전연령 러버인 저는 겁부터 집어먹었지만 갓고곰의 필력 앞에 무릎 꿇었다. 이렇게 상쾌하고 건강하며 청춘청춘한데 동시에 야하다니! 패배를 인정한다(대충 유노윤호짤 거기다 첫사랑 기억조작 정도는 저도 경험(?)이 있는데요 이런 짝사랑 기억조작은 처음이라 어떻게 씬을 읽으면서도 눈물이 줄줄 흐르는 건지 정말 당황스럽고 좋네요. 나는 이런 아름다운 짝사랑의 기억 같은 거 없는데 왜 이렇게 과몰입이 되는 거야…….

 

대한민국이 낳은 싸카스타. EPL 빅클럽 주전 공격수에 발롱도르 후보자로도 거론되고, 올해 26살로 한창 커리어 하이 찍고 계시는 두유노 클럽 축구선수 김무겸. 그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K리그 신생팀에 1년 임대를 오게 되는데(픽션이니까 넘어가자), 실력만큼이나 사생활도 월클인 이 문란한 놈은, 소속팀 신입 코치로 지난 월드컵 때 함께 뛴 수비수였던 하얀 얼굴의 동갑내기 이하준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무난하게 잘 지내보려고 한 김무겸과 달리, 어쩐지 이하준은 그를 피하는 모양새. 그리고 그게 김무겸의 신경에 거슬리기 시작하는데..!

 

문란공과 짝사랑수라는 대메이저 클리셰 서사인데도 이 작품이 독특한 것은 주로 ‘공 시점’에서 전개된다는 것이다. 즉 독자들이 실력, 피지컬, 재력 삼박자를 갖춘 까리한 미남의 속내를 구구절절 알 수 있다는 건데. 이놈, 상상 이상으로 유치하다! 멀쩡하게 잘생긴 얼굴 하고선, 이하준이 다른 사람과 조금만 웃으며 이야기 해도 속으로 온갖 불륜 막장 아침드라마급 소설을 쓰고 난리남. 어? 이거 이하준의 짝사랑물 아니었나? 괜히 김무겸이 BL작가공이라고 불리는 게 아닙니다. 이놈은 소설 쓰는 데 재능이 있어.. 거기다 이하준(특: 180cm 넘는 갓피지컬 전직 국대 수비수) 보고 토끼 같다 하질 않나, 남다른 주접 떠는 거 보는 재미도 있음. 

 

그 덕에 원래 짝사랑수/후회공/섹파관계 하면 떠올리는 애절·처연 분위기와 달리, 이 작품은 초딩공 김무겸의 시점을 주로 따라가다보니 감정선이 훨씬 직선적이고 단순해서 상쾌한 느낌을 준다. 꼬이는 거 없이 술술 읽혀요ㅋㅋ 하지만 천재 작가 갓고곰님은 짝사랑물 특유의 아련함도 놓치지 않았음. 중간 중간 등장하는 이하준의 시점이, 단순한 김무겸의 시선과 대비가 되면서 더 눈물이 난다ㅠㅠ 어른스럽고 차분한 하준이의 덤덤한 서술 속에서, 이 아이의 마음에 박힌 굳은살이 보여서 읽으면서 몇번이나 울었음...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긴 세월 동안 무겸을 멀리서나마 바라보며 살아갈 힘을 얻어왔으니까. 그러니까 이 짝사랑은 일방적인 물물교환 같은 것이었다며 ‘얻는 것 없이 사랑한 적 없다’ 말하는 하준이의 독백에서 오열했잖아요.. 그러면서도 김무겸이 선 넘으면 차분하게 빡치는 화내는 하준이가 넘 좋다 8ㅁ8 둘 다 단순한 루틴을 칼 같이 지키는 운동 선수라 그런지 애들이 몸도 마음도 굉장히 건강함ㅋㅋ

 

물론 하준이도 위태로운 면이 있고, 김무겸의 경우엔 그의 불행했던 가족사 때문에 엄청나게 꼬인 부분이 있긴 함. 그리고 결국 그게 불씨가 되어 하준이에게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한 채로 폭언을 쏟아붓는 개짓거리(...)를 하는데. 읽으면서 김무겸 등짝 내리치고 멱살 잡고 싶었다면 그것은 정상입니다(삐빅). 하지만 결국 그것도 건강하게 풀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흐뭇했다. 그야말로 청량하고 미숙한 청춘들이 조금씩 서로에게 맞춰가며 성장하는 서사.

 

씬이 많고 길다는 명성에 걸맞게 정말, 정말, 정말! 많고 긴데ㅋㅋ 솔직히 좀 기빨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쓸데없는 씬이 들어가 있다는 생각은 안 들었음. 모든 씬이 변화하는 두 사람의 감정선을 담고 있고, 그래서 그때그때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 심지어 씬 읽으면서 운 사람 전연령 처돌이라 취향 별점에서 별 하나 빼긴 했는데 정말 감정 묘사를 이렇게 섬세하고 아름답게 하는 작품은 손에 꼽아요.. 아름다운 문장과 그 속에 담긴 저릿한 감정 덕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작품일 것 같다.

 

 

 

 

'Novel > BL'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상/ 하베스트  (0) 2021.01.10
감상/ 인간관찰일지  (0) 2020.11.22
감상/ 죽은 애인에게서 메일이 온다  (0) 2020.10.21
감상/ 레인보우 시티  (0) 2020.10.12
감상/ 뉴비 키워서 갈아먹기  (0) 2020.09.28
감상/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연애사  (0) 2020.08.18
감상/ 적해도  (0) 2020.08.0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