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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Romance

감상/ 제인과 존슨 저택의 비밀

by 뀽' 2020. 10. 26.

제인과 존슨 저택의 비밀  /  산독기

★★★

그 음습한 비밀, 제가 사랑합니다

 

정말로 그녀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

 

※ 주의: 강하게 취향을 타는 비도덕적 요소가 포함된 작품입니다. 

 

1,500원이라는 가격(와! 싸다!), 4만자라는 분량(정말 짧다!), 그리고 로맨스 쪽에서 찾기 힘든 추리/미스터리/스릴러 키워드까지. 3~4시간 정도 생긴 여유시간 동안 후딱 읽을 것이 필요했던 사건물 처돌이 추리로판 러버는 완벽한 조건의 책을 발견했다. 그리고 결과는 성공이었습니다. 다만, 짧아서 읽기 시작한 책이었는데 짧은 게 아쉬워져버렸다ㅠㅠ

 

고아원에서 자란 주인공, 제인은 자신을 길러주신 다정한 원장 수녀님의 수술비를 어떻게든 마련해야 하는 상황. 그러나 평범한 일을 해서는 단기간에 목돈을 마련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때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제인 앞에 나타난 한 남자. 이름은 레이먼드 보르본으로, 존슨 백작 가문의 주치의라는 이 미남자는 제인에게 큰 보수를 약속하며 자신과 ‘공모자’가 될 것을 제안하는데…….

 

작품 리뷰란에 애거서 크리스티가 생각난다는 말도 있던데, 그 말 그대로 우리가 익히 아는 음산한 추리 소설 분위기가 짙게 깔린 소설이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 백작. 그의 하나 뿐인 아들은 미치광이라 감금을 당한 상태이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은 형의 유산만 노리고 있는 상황. 거기에 꼬장꼬장한 하녀장과, 척 봐도 수상한 미남 주치의까지. 사건이 나도 이미 골백번은 났을 것 같은(ㅋㅋㅋ) 이 무서운 조합에, 주치의와 짜고 간병인으로 들어온 제인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분량이 워낙 짧기 때문에 조금도 질질 끄는 부분이 없이 전개가 엄청나게 빠르다. 얼마나 빠르냐면 제인이 저택에 도착한 후 간병인으로 일하기도 전에 사건이 터짐ㅋㅋ 오전에는 하녀장에게 고개를 숙였는데 오후부터는 하녀장의 인사를 받게 되는 이 미친 스피디함……. 거기다 저택 도착 첫날부터 제인에게 오는 발신인 불명의 쪽지와 새벽마다 들리는 기괴한 울음소리, 백작이 보이는 수상한 태도, 그리고 대놓고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는 백작의 동생 등, 사건의 진상에 대한 힌트 조각들이 쉴 새 없이 주어진다. 작가님 저 숨차요 대신 떡밥과 복선들이 친절한 편이기 때문에 이해가 어렵지는 않음ㅋㅋ

 

추리도 추리지만 이건 로맨스물이니까 남주 레이먼드 씨 얘기도 안 할 수 없죠. 반짝반짝하는 백금발에 아름다운 녹색 눈을 가진, 사람 홀리는 외모의 이 미남자는 수상한 구석이 한두군데가 아닌데. 분명 제인과 공모자 관계임에도 이 남자의 정확한 목적을 알 수 없어 백프로 신뢰할 수 없다는 긴장감과 거기서 오는 텐션이 이 소설의 최대 장점으로 느껴졌다. 그의 감정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믿고 싶어졌다가, 여러 의심스러운 정황들 때문에 다시 의심하게 되는 제인의 마음 따라 독자의 마음도 이리저리 왔다갔다 합니다ㅋㅋ 그리고 결국 결말에서 제인과 독자는 경악스러운 진실에 도달하게 되는데..!

 

작가님이 뿌리신 떡밥을 차근차근 잘 주워먹었다면 중후반부에서 이미 진실을 눈치챌 수 있는데, 이게 너무 끔찍한지라 계속 에이 설마, 설마요, 제가 생각지 못한 엄청난 반전이 있겠죠, 하며 현실부정하기도 했음ㅋㅋㅋ 하지만 작가님은 어중간한 반전 없이 노빠꾸 직진 충격 결말을 주셨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 이 맛에 모럴리스 먹는 거잖아요^^ 심지어 주인공인 제인이 (작중 확언이 나오진 않았으나) 이 끔찍한 비밀을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한다는 뉘앙스라서 저는 더 희열을 느꼈습니다. 어떤 의미론 메리배드 엔딩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

 

다만 분량의 한계로 인해 로맨스 감정선이 급발진(...)처럼 느껴진다는 게 아쉽다. 연재물로 치면 고작 8~9화 밖에 안되기 때문에 사건 서술하기에도 벅찬 분량인지라 섬세한 감정선이 나올 수가 없음. 그래서 키스씬 나왔을 때 정말 당황했다ㅋㅋ 키스요? 여기서요? 또 작중 벌어진 살인 사건의 범인이나 알리바이, 트릭에 관한 것도 별것 없이 휘리릭 지나가서 허무함ㅠㅠ 물론 이건 로맨스물이므로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같은 그런 정통 추리물을 기대한 건 아니긴 했는데, 음산하면서도 매력적인 분위기를 잘 살린 작품인지라 나도 모르게 기대감이 커졌던 모양. 

 

두 주인공의 감정선과 살인 사건 추리 과정 등, 더 풍부한 에피소드로 분량이 지금의 서너배 되는 작품이었다면 더 내 취향이었을 것 같아서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모든 것이 굉장히 급박하게 진행된 짧은 작품이기 때문에, 왜인지 고전 명작의 ‘간추린 편집본 버전’을 읽는 느낌도 들었음. 하지만 이만한 분위기와 문장, 그리고 파격적 결말까지, 고작 1,500원 지불한 것치곤 충분한 사치였다. 작가님 저도 제인처럼 모른 척 짱 잘하는데 혹시 이거 판중하고 확장판(?) 내신다면 눈 감고 구매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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