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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Romance

감상/ 내게 복종하세요

by 뀽' 2020. 12. 13.

내게 복종하세요  /  견우

★★★★☆

치 떨리게 아름다운 공포

 

시체가 즐비한 눈밭 위에서

나타니엘은 가만히 그녀를 기다렸다.

 

집착, 피폐, 후회 같은 키워드가 들어간 소설더러 요즘 흔히 ‘맵다’고들 표현하는데, 그 모든 키워드의 극치를 찍고 있는 이 작품에는 왜인지 맵다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분노나 슬픔, 억울함 등에도 한계가 있는 법인데, 그걸 월등히 뛰어넘는 이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 지조차 모르겠어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를 마주했을 때 느끼는 경외심과 공포가 끔찍하리만치 아름답게 표현된, 한 편의 탐미적 코즈믹 호러 로맨스물.

 

시작은 의외로 평범(?)하다. 애인이 따로 있는 왕세자와의 정략적 약혼 관계를, 오로지 백작가 일원으로서의 책임감으로 버텨온 주인공 키리에 뷰캐넌. 용기 없는 왕세자 때문에 지지부진 이어지던 약혼은 1년 만에야 겨우 깨졌고, 분노한 백작은 키리에에게 근신을 명하며 별장으로 내려가라 이르는데. 가는 길에 폭설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근처에 있던, 지도에도 없는 수상한 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어째 공포영화 초반부 같다 그리고 기이할 정도로 조용한 그 마을에서 키리에는, 새하얀 풍경 속 홀로 이질적인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마을 사람들이 ‘종말’이라고 부르는 미지의 존재. 네, 이 남자가 바로 이 작품의 남주인지 빌런인지 나타니엘 되시겠습니다. 소설은 영화처럼 특수효과나 bgm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인외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묘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기우였구요..^^ 무섭다. 진짜 무섭다. 정적이 그 어떤 소음이나 비명보다도 무서울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음. 내리는 눈이 모든 소리를 집어삼킨 고요 속에서 “안녕”이라고 인사를 건네는 이 아름다운 남자가 정말로 인간이 아니라는 걸 키리에 뿐 아니라 다른 차원에 있는 저까지도 여실히 느꼈네요…….

 

하지만 그 이후로 나타니엘은 의외로 순하고(?) 착해보이는데요(???). 일단 키리에에겐 굉장히 호의적이라 오히려 캬 존잘인외능력남주가 유일하게 관심을 보인 대상이 여주라니 맛잇다! 하고 허버허버 로맨스 처먹게 된다. 제멋대로 굴지만 모든 행동이 우아하고, 상냥한 말씨를 쓰지만 그 기저에 오만함이 묻어나는 나타니엘의 캐릭성은 정말로 특별함. 이토록 매력적인 남주와 작품 특유의 신비한 분위기까지, (조금 무섭긴 해도) 초반은 흐뭇하게 읽었는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젠장 멍청한 인간들이 나타니엘의 힘을 빌리고자 키리에를 건드린 순간 종전의 고요한 평화는 끝난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타니엘의 진짜 본성이 나옵니다. 무서워무서워무서워

 

첫만남 장면부터 그랬지만, 이 작품은 나타니엘의 ‘인외성’을 나타내기 위한 말투와 행동 묘사 뿐 아니라 시청각적 연출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독보적이다. 그치지 않는 눈에 덮여 도시가 죽어가는 고요한 절망의 이미지서부터, 온몸이 떨릴 정도로 크게 울리는 천둥번개와 뺨을 때리는 폭풍우, 땅을 삼키는 거대한 해일의 역동적이고 파괴적인 모습까지, 과장 아니고 진짜 4D 안경 끼고 영화보는 줄 알았어요… 특히나 3권 <역전> 챕터에서는 소설에서만 할 수 있는 텍스트 연출이 나왔는데 그걸 본 순간 소름끼쳐서 손까지 떨렸닼ㅋㅋㅋ

 

인간의 이해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는 코즈믹 호러와 유미주의(唯美主義) 특유의 비인간적 분위기가 결합되어서, 고어 영화에나 나올 법한 끔찍한 장면들조차 아름다운 관현악단의 연주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소름끼침.. 너무 좋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타니엘의 존재감이 큰 만큼 도망치고자 하는 키리에의 절박함도 커지고, 마침내 그와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는 배가 된다. 아닌 게 아니라 나타니엘의 압도적인 힘과 분위기에 매료되어 키리에를 포함한 작중 모든 인물, 심지어는 독자까지도 감히 의문을 품지 못했으나 초반부터 계속 나왔던 ‘이상한 사실’이 바로 그 역전의 열쇠가 되는 서사까지 완벽함.

 

이렇게 구구절절 적어놓았듯 나타니엘이라는 캐릭터가 이 작품이 가진 매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데ㅋㅋ 그렇다고 여주인 키리에가 뒤떨어지는 건 아님. 이런 괴물(미안하다 나타니엘 하지만 괴물은 괴물이야)을 옭아맬 고삐가 보통 사람이어서 되겠어요? 거기다 극초반부터 드러났던 키리에의 지독한 책임감 및 정신적 불안요소까지, 작은 떡밥이라 생각했던 것도 모두 후반부 흐름을 좌우하는 데에 쓰인다. 

 

조금 촌스럽고 초라하더라도 동화적인 따뜻함을 좋아하는 내 취향판에선 조금 빗겨 간 결말이었지만, 또 그게 이 시리고 아름다운 작품 분위기와는 잘 맞는다는 생각도 듦. 오만하고 아름다운 인외조차 ‘복종’시키는 감정이 퍽 잔인하고도 낭만적이라서… 앞으로 눈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이 작품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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