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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Romance

감상/ 흰제비꽃 아가씨

by 뀽' 2020. 12. 8.

 

흰제비꽃 아가씨  /  주가람

★★★

회귀물 클리셰와 제인 오스틴의 만남


저에 대한 당신의 한 가지 오해를 풀고자 합니다만,

레이디께서 내키지 않더라도

부디 이를 너그럽게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래도록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평화의 시대. 변경백의 딸 소피아 고든은, 비록 혼인 적령기를 살짝 지났지만 그럭저럭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 대단하신 스펜서 공작가의 후계자, 에드먼드 스펜서와 약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약혼 4개월 만에 에드먼드에게 임신한 애인이 있다는 것이 밝혀져 불명예스러운 파혼을 한 후 그녀에게 쏟아지는 조롱의 시선. 에드먼드의 애인이라던 여자의 갑작스런 죽음과, 그 범인으로 지목된 고든 백작가. 삽시간에 무너져 내리는 모든 것들에 절망할 새도 없이, 고용인이었던 자에게 겁탈당할 위기에서 도망치던 소피아는 사고로 죽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 전으로 시간이 돌아와 있다?! 


작품 소개만 놓고 보면 흔한 회귀물이지만, 이 작품이 특별한 것은 이 흔한 설정과 전개를 제인 오스틴 감성으로 녹여냈다는 데에 있다. 고전 영미 문학을 번역한 듯한 문체가 호불호를 강하게 타긴 하지만, 번역체만이 줄 수 있는 낭만적인 그런 감성이 있다구요!ㅋㅋ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고집 있고 말재간 좋은 매력적인 리지과 그녀의 언니―아름답고 착하며 순종적인 장녀 제인 사이 그 어드메에 있는 소피아 고든의 캐릭터는 확실히 어떤 종류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구석이 있음


모든 사달이 다 에드먼드 스펜서와 약혼을 해서 생긴 일이니 이번엔 약혼하지 않겠다! 하고 당돌하게 청혼을 거절한 소피아. 하지만 오히려 에드먼드는 그녀의 곁을 맴돌고, 회귀 전에 뭔가 오해가 있었음을 깨닫고, 배후에 숨어 있던 진짜 악당이 누구였는지 밝혀내서 복수하는 이 흐름은 모두 로판 고인물의 예상 범위 내였지만 그 흐름을 이끌어가는 아름다우면서도 재치 있는 대화들은 정말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ㅇㅁㅇ... 이건 뭐 너무 좋은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넼ㅋㅋ


사실 작품(특히 1권)에서 <오만과 편견> 향기가 정말 지독하게 나긴 해요. 오만한 에드먼드의 청혼을 소피아가 거절하며 벌이는 언쟁 장면이나, 은근한 압박을 주는 어른께 적절히 받아치는 소피아의 말솜씨, 응접실에서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지 않고 편지를 쓴다는 핑계로 앉아 소피아를 지켜보는 과묵한 에드먼드의 모습 등, <오만과 편견>의 오마주라고 생각되는 장면들이 곳곳에 있음ㅋㅋ 나는 이런 장면들이 좋았는데, 누군가에겐 오히려 불호 포인트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다만 회귀 전에 그 모든 사달을 낸 배후의 악당이, 내 기대보다 단수가 너무 낮아서..! 2권은 읽는 내내, ‘아니 고작 이런 놈 하나 제대로 처리를 못해서 이런 극단적인 수까지 써야 한다는 말이야?’ 하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개연성 측면에서도 납득이 잘 안 가기도 하고, 이런 허접(...)에게 늘 당하기만 했던 남주의 가오가 안 살기도 하고…ㅠㅠ 하지만 생각해 보면 실제 현실에서도 사람들이 다 미친 지략캐인 건 아니잖아요? 어쩌면 내가 그동안 너무 먼치킨 짱짱캐들에게 익숙해져있던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괜찮아짐 (편-안)ㅋㅋㅋㅋ


악당의 포스와 이들을 물리치는 갈등 해결 방식이 아쉽긴 했지만, 소설 전반에 흐르는 고전적인 감성과 유려한 분위기 덕에 단점조차도 세련되게 잘 포장되어 있다는 느낌. 표지처럼 특유의 물 번지는 느낌이 아름다운, 한 폭의 잔잔한 수채화 같은 느낌이 드는 소설이었다. 웹소설 특유의 짧은 단문에 조금 지친 독자라면, 이런 고전적인 감성이 넘치는 작품으로 환기해보는 것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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