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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Romance

감상/ 어느 용을 위한 신화

by 뀽' 2021. 6. 24.

어느 용을 위한 신화  /  서사희

★★★☆

운명 앞에 고상하게 굴복하는 이야기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

 

‘사악한 용을 물리친 용사와 왕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의 러브 스토리’라는, 누구나 아는 클리셰의 원형에 가까운 설정을 살짝만 비튼다면. 그래서 용사가 아니라 ‘사악한 용’과 사랑에 빠지는 공주의 이야기는 어떨까! 하는, 누가 봐도 맛있는 설정으로 시작한 소설ㅋㅋ 그리고 여기에 작가님 특유의 철학적인 질문과 주제들이 한 보따리 들어가, 달달한 사랑 이야기와 씁쓸한 이데올로기 싸움이 오묘하게 섞여 있는 작품 되시겠다. 

 

서두에 나오는 배경은 간단하다. 지하에 살던 사악한 붉은 용이 천년 만에 마계 문을 열고 인간 세상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은 이 용을 물리치는 자에게 왕위를 물려줌과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공주인 바네사를 왕비로 맞게 해주겠다는 칙령을 내렸는데… 문제는 공주가 외동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왕위를 노리는 살벌한 형제자매들이 있다는 말씀 8ㅁ8! 안 그래도 뒷배 없어서 숨 죽이고 살아왔는데 이 거지 같은 칙령 하나 때문에 바네사는 언니오빠 손에 죽게 생겼으니. 빡친 절망한 바네사가 홀로 방에서 아버지 욕을 하던 그날 밤, 붉은 용이 찾아오는데..?!

 

이렇게 요약해놓으니 가벼워 보이지만 원작은 작가님의 무게감 있는 문장과 서술로 굉장히 몰입도가 높습니다ㅋㅋ 가진 게 ‘아름다움’ 밖에 없는 바네사가 자신의 무지와 무능력에 절망하는 심리 묘사가 굉장함. 이건 권력을 가진 첫째 언니 루이즈에게 바네사가 열등감을 가진 걸로도 표현이 잘 되는데, 마음껏 공부하고 노력해서 지금의 자리를 쟁취한 루이즈와 달리 눈치 보느라 책 한 권 마음대로 읽을 수 없던 바네사의 처지가 극명히 대비되어 씁쓸하다. 왕국의 모든 사람이 바네사를 아름답고 순결한 트로피 취급하고, 그것이 그녀가 유일하게 택할 수 있는 생존 방식이었기에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제 그것 때문에 죽게 생겼으니……. 

 

그러나 그렇게 막다른 길에 몰린 바네사에게 붉은 용은 그녀가 상상도 못했던─그리고 들어본 적조차 없던─ ,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는 말을 입에 담는다. 그 한 마디에 무언가를 느낀 바네사는 사람들의 일방적인 기대를 배신하리라 결심하고… 붉은 용과 자는데!ㅋㅋ 상당히 갑작스럽게 동침을 하게 되는데도, 치기 어린 반항이나 철없는 일탈로 느껴지긴커녕 도리어 어떤 속박에서 풀려나는 듯한 해방감이 느껴짐. 특히 ‘순결을 잃는다’는 것에 공포를 느끼던 바네사가 첫경험을 하고 나서도 자신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고, 심지어 ‘잃은 것’조차 없었다고 독백하던 서술은 짜릿했다. 

 

이렇듯 여성의 성장 서사가 담겨 있는 작품이지만 고전적인 로맨스 특유의 낭만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 이 작품의 장점인 듯. 일단 두 사람의 첫 잠자리부터 에로스와 프시케 신화에서 따온 것이 보이니까요ㅋㅋ 캄캄한 방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그러나 굉장한 미남일 것이라고 독자는 예상하는─ 신랑(?)과의 첫날밤이라니 아 클래식 아닙니까ㅋㅋㅋ 그리고 로판남주답게 신비롭고 오만하면서도 매우 다정하고 조신한 붉은 용과,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되기로 정해져 있던’ 것 같은, 숙명적이기까지 한 사랑 서사가 쌓이는 것까지 정말 교과서적인 로판 러브라인ㅋㅋ

 

다만 작가님 특유의 철학적 대사나 독백들이 러브라인 서사와는 잘 섞이지 않고 다소 겉돈다는 느낌이 들긴 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권력의 주체는 누구인가, 여성의 순결에 대한 집착, 그리고 시스템적으로 노력을 통해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있던 사람과 처음부터 기회조차 없던 사람의 차이 등 많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 제기가 바네사의 성장 서사와는 잘 맞아들어가는 반면 러브라인에서는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았음.

 

물론 붉은 용이 조력자 포지션으로 성장 서사에 기여하긴 하는데, 말 그대로 ‘조력자’다. 이런 남캐조형은 여성 단독 주인공의 성장을 강조하기 위해 쓰일 수도 있는데, 여기선 바네사가 작중 다른 사람은 다 아는 세상의 진실을 홀로 후반부까지 모르다 보니 그녀의 성장이 다소 빛바래기도 하고ㅠㅠ 그리고 미래를 바꾸기 위해 바네사나 붉은 용 모두 노력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모든 것이 (숙명적인 러브라인 서사를 위해서라곤 하나) 운명론으로 귀결되어 허무한 감도 있다. 얘들아 이런 건 못 받아들이겠다고 더 꿈틀거리고 난리칠 생각은 없었니..? 인간찬가 좋아하는 독자는 아쉽다…….

 

하지만 돌고 도는 이 거대한 운명의 이야기를 2권이라는 짧은 분량 안에 이렇게 몰입도 높게 담아낼 수 있는 작품이 얼마나 될까ㅋㅋ 작가님 전작에서 철학과 사랑 이야기가 정말 떼려야 뗄 수 없이 서로 진득히 얽혀있던 것도, 끝끝내 저항하던 인간의 이야기도 너무 취향이었어서 이번 작엔 다소 아쉬운 평도 남겼지만, 떡밥 착착 회수되고 앞뒤 서사 잘 짜인 작품이니까요ㅋㅋ 거대한 운명 앞에 결국 무릎 꿇은 이들의 이야기가 좋다면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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