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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Romance

감상/ 혼자 걷는 새

by 뀽' 2021. 11. 6.

혼자 걷는 새  /  서사희

★★★☆

잔잔하게 요동치는, 클래식한 후회남 서사

 

스스로에 대한 모든 것을 배반하는 심정으로

항복하듯 인정하고야 말았다.

네가 아닌 답을 찾으려 방랑하던 그 길들은,

결국 모두 네게로 이어지고 있었다고.

 

※주의: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글입니다.

 

사랑 이야기를 하면서도 지독한(좋은 의미) 철학적 물음들을 끊임없이 던지던 서사희 작가님이, 이번엔 정말 대중적인 테이스트의 후회물을 들고 돌아오셨다ㅋㅋ 행복하고 건강한 독자들을 쫓아다니며 존재론적 사유를 질문하는 철학자 같던 분위기는 쏙 빠졌음! 벼랑 끝에 내몰렸으나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주인공 여원과, 완벽한 듯하나 어딘가 결여된 남자 이석의 이야기가, 정말 표지처럼 비 내리는 풍경에 잠식되듯 잔잔하고 먹먹하게 전개된다.

 

본래 평범한 회사원이었다가 어머니의 사채빚으로 인해 한순간에 인생 나락으로 빠지게 된 여주인공과, 그런 여주인공 앞에 갑자기 나타나 상환 기한을 3년 후로 미뤄준 남주인공. 익숙한 구도죠?ㅋㅋ 하지만 중요한 건 남주 장이석이 딱히 대단한 구원자처럼 그려지진 않는다는 것. 일단 이놈은 정상적인(?) 재벌이 아니고, 사채업자의 동생이자 조폭기업인 삼진그룹의 막내 아들이다. 그래도 빚 갚느라 여기저기 몸 굴리게 되는 것보단, 장이석의 고정적인 섹파가 되는 게 나으니까ㅠ 애초에 여원에게 선택권 같은 게 있을 리 없지, 그냥 눈앞에 보이는 차악을 택하는 수밖에ㅠㅠ

 

그리고 장이석의 호의는 딱 거기까지임. 여원은 어마어마한 사채빚을 갚는 와중에도 본인이 먹을 것, 입을 것을 다 자기가 돈 벌어서 마련해야 한다. 상환 기환 미뤄준 것만 해도 대단한 거 아니냐 하겠지만 애초에 3년 안에 갚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닌 걸……. 그와중에 이석의 말씨는 또 다정한 연인 같아서 정말 거지 같은 희망고문이 아닐 수 없다^^ㅋㅋ 사랑에 빠진 남자처럼 굴다가도, 빚 얘기를 꺼내면 “네 빚은 네 빚이지 여원아”하며 선 넘지 말라는 이 미친놈을 어쩌면 좋지..

 

다만 이것은 후회물이기 때문에 장이석이 땅을 치고 후회하며 울고불고 여원이에게 매달릴 미래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ㅋㅋ 그리고 작가님은 이 미래를 굳이 뒤로 미루지 않고 시원하게 첫장면부터 박아버리심. 구성 자체가 현재-과거-현재-과거를 오가며 후회구간과 업보구간을 번갈아 보여줌으로써 장이석에 대한 독자의 분노가 적정 수준에서 유지되도록 만드는 작가님의 스킬이 빛난다ㅋㅋ 또 결정적으로 장이석이 과거 그렇게 행동했던 이유가 나중에 풀리는데, 그게 이 작품 서사의 키포인트인 듯. 바로 장이석이 ‘정신 질환자’라는 것.

 

초반부터 떡밥이 깔린 터라 아주 큰 반전은 아니지만, 저 설정을 어느 정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장이석 캐릭터에 대한 호오가 상당히 갈리는 듯. 장이석에 대한 원색적인 분노와 증오를 표출하는 후기가 많아서 읽기 전엔 좀 걱정했는데, 읽고 나서 보니 이게… 일반인 기준을 들이대면 당연히 소름끼치고 화나겠지만, 얘는 일반인이 아니잖아요?! 선천적인 정신질환자라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 자체가 얘한테는 없다는 게 너무 와닿아서…… 난 장이석한테 딱히 화는 안 난다, 그냥 좀 많이 무서워서 그렇짘ㅋㅋㅋ

 

이석의 캐릭터가 역동적인 것에 비해 여원이는 좀 심심했다. 진창을 구르면서도 근면성실하게 매순간 아득바득 살아남으려 발버둥쳤다는 점이 이 캐릭터의 굉장한 매력 요소인데, 문제는 여원이 이성적이고 차분하다는 게 강조되다보니 감정적인 면모는 독백으로 그치고 표면화되어 나오질 않는다. 조금이라도 욕 먹을 수 있는 민폐 요소는 완벽하게 거세된 느낌. 여원이도 화가 나서 쏘아붙이다 말 실수도 하는 등의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되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무결하게 느껴지는 게 오히려 내 취향으론 흠이었음.

 

둘이서 격렬한 스파크 튀기며 언쟁하던 짜릿한 결말부 전까지는 비슷한 내용의 독백이 반복되는 느낌인 것도 아쉬웠다. 작가님 전작에선 이런 류의 독백이 철학적 사유와 연결되면서 논의 자체가 나선형으로 점점 발전해가는 구조였는데, 이번 작에선 골치 아픈 철학 얘기가 쏙 빠졌다보니 감정선과 이야기가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느낌을 준다. 어려운 얘기가 없다보니 훨씬 쉽게 읽히긴 하는데 전작 같은 깊이감은 없어져서 그게 또 아쉬운 독자 8ㅁ8...

 

그래도 서술자의 감정에 조용히 젖어들게 만드는 작가님의 필력은 여전해서 정신 차려보니 울고 있더라ㅋㅋ 마음에 와서 박히는 표현도 셀 수 없이 많았고, 무엇보다 그동안의 흐린 날이 이제 막 개이기 시작한 것 같은 외전 결말이 정말 좋았음. 이미 상처받은 이상 완벽한 치유 같은 건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사랑하고 또 살아가는 게 인간 아니겠습니까!ㅋㅋ 늘 현실적인 포근함을 선사하는 작가님의 작품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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