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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Romance

감상/ 버림받고 즐기는 소박한 독신의 삶

by 뀽' 2021. 9. 14.

버림받고 즐기는 소박한 독신의 삶  /  박귀리

★★★☆

결혼까지 가는 길이 멀고 험해도

 

나는 당신과 고작 연인 따위가 될 생각이 없거든.

 

※주의: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되어 있는 글입니다.

 

로맨스 소설의 끝은 결혼이라고 하던가? 그러나 사람들이 흔하다 비웃는 그 해피 엔딩에 도달하기까지, 이토록 힘겨운 나날들이 가득할 줄은 몰랐다. 300화에 이르는 분량 동안 설렘과 실망, 절망과 환희를 오가는 대서사시 끝에 마침내 거머쥔 클리셰 엔딩은 퍽 감동적이다. 이걸 위해서.. 이걸 위해서...! (울먹

 

주인공 캐서린이 그지 같은 집안을 박차고 나오는 사이다 도입부를 읽을 때만 해도, 웬 수상한 저택을 매입했다가 지하실에서 수상한 미남과 마주쳤을 때만 해도, 이것들이 아닌 척 썸을 타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아 우리의 주인공이 구박받던 지난 세월을 이제 보상받고 잘생긴 대공님과 결혼에 골인하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이야기는 점차 상상도 못했던 방향으로 궤도를 튼다. 말하는 마법진, 말하는 고양이, 그리고 말하는 식물(?)까지 나오는 이 귀염깜찍한 판타지 세계관에 정신없이 웃다가 끄억끄억 울었네요. 설정은 촘촘하고 서사는 두껍다. 가벼운 작품이 아님.

 

한마디로, 계모와 이복자매한테 복수하고 새 남자 만나는 신데렐라 서사는 이 소설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소소한 개그물인 척 하는 초반부에도 이미 천사와 악마, 황제와 교황, 그리고 테러리스트 소리 듣는 혼혈까지, 후에 나올 거대 서사를 위해 자잘하게 깔리는 설정들이 가득함. 무엇보다 남주인 체자레 대공이 돈 많은 건 둘째 치고,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 마법도 마구 부린다. 딱 봐도 인간 아닌 각이 나오죠? 공식적으로 120살 먹은 초월자라는 소리 믿고 있다간 뒤통수 맞아요. 이분, 자그마치 약 2000살 먹은 대악마다. 100살 연상인 줄 알았는데 2000살 연상일 줄이야

 

하지만 다들 50살 연상은 X발처죽일새끼 해도 500살 연상은 음 존맛~하듯이, 인외는 나이가 많은 게 좋다^^ 이 우아하고 젠틀한 2000년 묵은 대공은 연상남의 모든 장점을 가지고 있음ㅋㅋ 돈 많고, 아는 거 많고, 여유까지 갖춘 젠틀한 으른미남이 다른 사람들에겐 선을 그으면서 유독 캐서린에게만은 다정하게 구는데,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 검증된 클리셰가 안 통할 리가 없잖아요 개설렘ㄷㄷ 거기다 캐서린 주위에 꼬이는 남자가 많기 때문에 질투하고 삐지고 아주 귀엽게 논다.

 

원앤온리 트루럽 치고는 확실히 남캐들이 많은 편이긴 하다. 일단 서브남(구남친) 퍼시빌은 캐릭터 자체에 대한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서사가 엄청나게 쎔. 그러나 메인과 서브의 경중 조절을 작가님이 워낙 귀신 같이 잘하시고, 그 외의 남캐들은 역하렘을 위해 존재하는 캐릭터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 이 작품은 거대한 판타지 세계관을 다루고 있고, 그 안에서 캐서린이 각성하고 성장해나가는 게 주요 플롯임. 따라서 주요 미남캐들도 캐서린과 성애적인 감정이 아닌 다양한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데 이게 정말정말 좋아요 8ㅁ8

 

거기에 귀여운 고양이 마물과 귀여운 식물 마몬(?) 등 조연캐들 하나같이 다 개성 있고 매력적이라ㅋㅋ 그 많은 등장인물을 다루면서도 하나하나의 캐릭터성이 강렬하고 모두 서사에 잘 녹아들어 있는 게 신기. 다만 선역이든 악역이든 내 마음을 사로잡는 여캐가 없었다는 게 좀 아쉽다. 중요 여캐가 둘 정도 있긴 한데 서사적 중요도에 비해 분량이 적고, 무엇보다 주인공인 캐서린이 약간 어중간해서…. 분명 후반 갈수록 세계관 설정 상 강한 축인데 너무 쉽게 남캐들에게 입술을 빼앗기니 강자로서의 가오 카리스마가 안 산다. 초반 무덤덤하고 담백한 맛이 있던 캐릭터에 허당 귀요미 속성이 애매하게 추가된 느낌.

 

캐서린에게 마음을 덜 주어서 그런가, 그녀가 본격적으로 나서는 4부(결말부)의 전개가 모든 떡밥과 복선을 회수하며 이 대서사시를 개연성 있게 마무리 짓는 전개였음에도 몰입도가 다소 떨어졌음. 3부까지 나를 울리고 웃기고 설레게 하던 ‘으른미 넘치는 연상남주’ 키워드가 전복되어버린 것도 컸고…. 그러나 이건 내 개인 취향상 로맨스적 재미가 떨어졌다는 것이지 결말 가서 힘 빠지고 이런 건 절대 아닙니다, 아주 기가 막히게 잘 마무리 됨ㅋㅋ 특히 엔딩은 취향과 상관없이 이 서사를 따라온 독자라면 울컥하게 되어 있다.

 

로맨스 비중이 큰 작품을 찾는 독자라면 뭐 이렇게 딴 얘기가 많아? 할 수도 있지만, 판타지 세계관에 아주 맛깔나게 잘 뿌려진 로맨스를 원하는 독자라면 이 작품만한 것도 없을 것 같음.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거대한 세계관 속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고, 그 중심축엔 캐서린과 체자레의 트루럽 서사가 단단하게 서 있다. 판타지와 로맨스 모두 잡는 두께 좀 되는 소설 읽고픈 독자에게 추천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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